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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부모찬스 없다…中 한반도 급습에 줄줄이 참전한 美장군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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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중공군 참전 북한 살려

50년 10월 25일 첫 전투 70년째 기념

시진핑·리커창 행사 참석해 무게 실어

김정은, 중공군 묘지 참배해 공적 기려

당시 전사 마오쩌둥 아들 묘지도 찾아

유엔군, 대통령·장군의 자식들이 참전

아이젠하워·패튼·워커·밴플리트 아들

밴플리트 외아들, 야간 폭격 도중 실종

위기 앞 ‘부모 찬스’ 없이 공정·당당 근무

15만 국군 장병, 민간인 희생도 기억해야

부모 찬스 따위는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부모의 명예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힘들고 위험한 임무를 자원했다. 70년 전인 1950년 발발한 6·25전쟁에서 한국민의 자유와 자신들의 명예를 함께 지킨 유엔군 장군들의 아들 이야기다. 당시 국군과 미군, 영국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비상한 각오로 북한군과 중공군의 공세를 필사적으로 막아 정전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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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군단'으로 유명한 조지 패튼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미국이 6.25 전쟁 기간인 1953년 발행한 기념우표. 패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불굴의 의지와 추진력, 그리고 해박한 전쟁사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창의적인 작전으로 파시스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패튼의 아들인 조지 패튼 4세도 전차중대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중국과 북한이 10월 25일 중공군의 첫 전투 70주년 행사를 열면서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이 당시 사망한 것을 내세우지만 6.25전쟁에 참전한 미국 장군의 자식은 모두 4명이나 된다. 사진=미국 우편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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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반도 첫 전투일 10월 25일 기념



한국에선 기습 남침을 당한 1950년 6월 25일을 주로 기리지만, 북한에선 정전협정을 맺은 1953년 7월 27일을 승전기념일로, 중국에선 한반도 북부에 잠입해 첫 기습을 가했던 10월 25일을 항미원조 의용군 기념일로 각각 기념한다. 서로 전쟁을 보는 성격이 다름을 잘 보여주는 기념일 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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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앞줄 오른쪽에서 셋째)와 리커창 총리(앞줄 오른쪽에서 둘째)를 비롯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10월 2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 작전 70주년 기념 대회’에 참석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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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 50주년을 맞은 올해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7월 27일 “부산을 눈앞에 두고 낙동강에서 돌아서야 했던 노병들의 피눈물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자국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하고 조선, 즉 북한을 돕는다는 의미) 전쟁이라고 부르는 6·25에 대해 “정의와 평화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지난 10월 19일 열린 관련 전시회를 둘러본 뒤 한 발언이다. 명백한 침략의 역사를 정치적으로 미화하고 왜곡하는 행위다. 이에 대해 전쟁 피해국인 대한민국의 정부가 항의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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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 작전 70주년 기념 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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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6·25 참전에 반성도 사과도 없어



중국과 6·25전쟁의 연결고리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년)이다. 마오는 6·25전쟁 전에 팔로군(중국 공산당의 군대) 소속 조선인들을 귀국시켜 조선인민군(북한군)에 입대하게 했다. 팔로군의 조선인 부대는 조선인민군 4사단과 6사단으로 재편됐다. 이들은 6·25전쟁 당시 남침과 서울 점령의 선봉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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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항미원조기념관에 북한 김일성과 중국의 마오쩌둥이 악수하는 사진이 걸려있다. [항미원조기념관 웹사이트 캡처]


중국 혁명에 참여했던 최용건은 6·25전쟁 발발 당시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겸 민족보위상이었다. 펑더화이의 부관으로 팔로군 포병 사령관을 지낸 김무정도 조선인민군의 핵심으로 평양방어 사령관을 맡았다. 6·25 발발에는 중국의 역할과 책임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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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 작전 70주년 기념 대회’에 참석한 퇴역 군인들이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연설을 듣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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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김일성이 위기에 처하자 펑더화이(彭德懷·1898~1974년)를 사령원(총사령관)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항미원조의용군)을 파병해 그를 살렸다. 인민지원군은 중국 공산당의 정규군인 인민해방군 부대를 이름만 바꿔 파병한 것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조금이라도 회피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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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0월 21일 중국 인민지원군 한국전쟁 참전 70주년을 기념해 우의탑에 꽃바구니를 보냈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2일 전했다. 신문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와 우리나라 애국가가 주악되었다″라며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의 존함을 모신 꽃바구니가 우의탑에 진정되었다″라고 보도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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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인민지원군은 정전이 된 지 5년 3개월이 지난 1958년 10월 26일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김일성이 중국 출신의 연안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강화한 시기다. 중국 인민지원군은 연인원 135만 명이 참전해 전시 60만 병력을 유지한 것으로 파악된다. 사상자에 대해 중국 당국은 15만2000여 명으로 주장하지만, 미국 당국은 전사 40만 명 이상, 부상 48만6000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이처럼 6·25전쟁에서 중국의 책임은 무겁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다. 한중 관계의 빈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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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단동의 인민지원군 기념 시설. 가운데 동상이 당시 사령원(총사령관)이던 펑더화이다.(왼쪽 사진)ㅂ6.25당시 중공군이 건너간 압록강의 모습. 건너편이 북한이다. 사진=감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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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익 위해서라면 언제든 한반도 개입 여지



1950년 6·25전쟁과 관련한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의 북한 정권과 김일성 지원은 ‘북·중 혈맹’의 뼈대가 됐다. 중국은 지원군 최초 교전일인 10월 25일을 항미지원의용군의 날로 기리는데 올해 행사에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참석했다. 시 주석은 6·25 참전이 평화를 위한 개입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드러난 역사적 사실을 보면 중공군은 소련의 지시로 공산주의와 중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에 들어왔다. 이는 중국이 국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한반도에 무력개입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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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군복 차림의 마오안잉. 마오쩌둥의 장남이다. 사진=위키피디아






폭격에 숨진 마오쩌둥 아들, 북·중 혈맹 상징



북한과 중국이 6·25와 관련해서 끝없이 반추하는 인물이 마오쩌둥의 아들인 마오안잉(毛岸英·1922~50년)이다. 마오안잉은 당시 북한에 파병돼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의 총사령부에서 러시아어 통역으로 근무했다. 마오안잉은 소련에 유학해 프룬제 사관학교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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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가 10월 21일 평남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의 마오안잉 묘지에 참배하고 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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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오안잉은 1950년 11월 25일 미군기의 정찰에 이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사망했다. 당시 폭격이 시작되자 펑더화이 등은 인근 동굴로 피신했으며 마오안잉만 폭사했다. 이에 대해 마오안잉이 당시 회의차 사령부에 왔던 전방 지휘관이 선물한 신선한 달걀로 볶음밥을 만들어 먹다가 미처 피하지 못했다는 설이 오래전부터 퍼졌다. 하지만 중국의 공식 전사는 그가 영웅적으로 기밀서류를 들고나오다 피신 시기를 놓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오안잉의 유해는 북한 평안남도 회창군의 인민지원군 열사능원에 묻혀 있다. 북한은 중국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북·중 관계가 좋으면 최고지도자가 이곳을 찾아 헌화하는 행사를 벌여왔다. 마오안잉은 북·중을 잇는 상징이 됐다. 올해도 김정은위원장이 이곳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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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0월 22일1면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릉을 참배했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한국전쟁 참전 70주년을 기념해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열사릉원을 찾아 경의를 표했다. 참배에는 최룡해·리병철·김덕훈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과 박정청·김재룡·리일환·김형준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성원들이 참가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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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만큼 미국도 필사적으로 대응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은 마오안잉의 사례를 정치와 사상 교육에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최고 지도자의 아들도 최전선에 보내고 때로 전사하기도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공산권의 특징이 아니다. 당시 공산군과 치열하게 싸웠던 미군도 마찬가지다. 6·25 전쟁에는 미군 원수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장인 조지 패튼, 월턴 워커, 제임스 밴 플리트 등의 아들이 참전해 최전선에서 실전을 치렀다. 공군인 밴 플리트의 외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4세는 폭격 임무 중 격추돼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장군의 아들들은 머나먼 나라 한국에서 벌어진 공산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참전해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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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았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군에서는 육군 원수까지 진급했다. 사진=백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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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아들, 대대장으로 참전



1952년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로 한국을 방문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년)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1922~2013년)는 1952년 보병 대대장으로 참전했다. 존은 형 더드가 4살 때 숨진 뒤에 태어나 실질적인 외아들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6월 6일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최전방 근무를 자원했지만, 미군 수뇌부는 그가 전사하거나 다칠 경우 군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유럽 전선의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존 아이젠하워는 타의로 최고사령부에서 근무하다 종전을 맞았다. 이 때문에 6·25전쟁은 그의 첫 실전 경험이 됐다. 그는 부친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사령부의 지시로 잠시 부자 상봉을 했는데 얼른 부대로 돌아가 부하들과 함께 전선을 지키라는 부친의 질책을 받고 귀대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존 아이젠하워는 1970년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1975년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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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1990년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딴 핵추진 항모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함에 탑승하고 있다. 진수식은 아이젠하워 사령관이 2차대전 당시 기획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45주년 기념일인 1990년 6월 6일에 이뤄졌다. 사진=미국 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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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은 아들에게 할아버지와 같은 데이비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임기 중 대통령 별장을 보수하면서 자신의 아버지와 손자의 이름인 데이비드를 붙여 ‘캠프 데이비드’로 불렀다. 현재까지도 대통령 별장과 외교 행사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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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미군 제2기갑사단장 시절의 조지 패튼 4세. 사진=미국 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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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군단 패튼의 아들 전차중대장으로



‘전차군단’으로 유명한 2차대전의 영웅 조지 패튼(1885~1945년) 장군의 아들인 조지 패튼 4세(1923~2004년)도 1953년 6·25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40보병사단 140전차대대 A중대장으로 근무해 은성무공훈장과 부상장인 퍼프하트를 수훈했다. 훈장이 말해주듯 몸을 사리지 않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는 1942~46년 웨스트포인트에 다니느라 2차대전에 참전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첫 실전 경험을 한 그는 나중에 베트남전에 참전해 2개의 전쟁을 치를 군인이 됐다. 1980년 소장으로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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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미 8군 사령관 시절의 월튼 워커 장군. 1950년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사진=미국 육군역사재단





전사한 8군 사령관 아들, 보병 중대장으로



6·25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으로 근무하다 교통사고로 숨진 월턴 워커(1889~1950년) 대장의 아들 샘 워커(1925~2015년)도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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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8군 사령관으로 일하다 1950년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숨진 월튼 워커 장군의 아들인 샘 워커. 당시 한국에서 장교로 근무하다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유해를 미국으로 운구하는 임무를 맡았다. 사진=미국 육군


1946년 웨스트포인트를 마치고 임관한 그는 4보병사단의 중대장으로 6·25에서 실전을 경험했다. 6·25와 베트남전에 모두 참전했으며, 1977년 당시 최연소 대장으로 진급해 부자 대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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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미 8군 사령관 시절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 사진=미국 전쟁부





밴 플리트 8군 사령관 아들은 폭격 중 실종



8군 사령관으로 국군의 전력 증강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한국군의 아버지’로 불린 제임스 밴 플리트(1892~1992년) 대장의 외아들인 제임스 밴 플리트 4세는 한반도에서 실종됐다. 공군이던 그는 1952년 4월 4일 B-26 조종사로 북한 순천 지역을 폭격하다 대공포에 격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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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인 제임스 밴플리트 4세. 6.25전쟁 중 공군 조종사로 북한 순천 지역을 폭격하다 격추돼 실종됐다. 사진=한국전쟁 프로젝트


당시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지만, 사실은 북한에 억류돼 중국과 소련을 전전하다 사망했다는 주장이 최근에 나왔다. 밴 플리트 사령관은 아들의 실종 당시 다른 실종자보다 더 일찍 수색을 종결하도록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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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전사자를 기리고 실종자를 찾는 사업을 벌이는 한국전쟁 프로젝트의 홈페이지에 있는 미국의 주별 6.25전쟁 희생자 현황. 녹색은 6~499명, 노란색은 500~1000명, 붉은색은 1001~2602명의 희생자를 낸 주다. 사진=한국전쟁 프로젝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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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진실 변할 수 없어



이런 사실을 보면 6·25전쟁에선 미군은 필사적으로 공산 세력의 확산에 대응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군은 2차대전의 명장과 그들의 자식까지 한반도에서 싸웠다. 미군은 3만6574명의 전사자와 10만3284명의 부상자를 냈다. 3737명에 실종됐으며, 4439명이 포로가 됐다. 한미동맹은 이렇게 피로 이어진 관계다.

유엔군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군대는 국군이었다. 대한민국의 국군은 14만 9005명의 전사자와 71만 783명의 부상자라는 큰 피해를 봤으며 13만 256명의 실종자를 냈다.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해 조국을 방위했다.

중국과 북한이 아무리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떠들어도 6·25전쟁은 중국의 지원과 북한의 침략으로 이뤄진 살육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시대와 국제 환경이 변해도 당시 이런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사람을 기억해야 할 이유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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