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편집국에서] 금융권력의 카르텔을 해체하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5000억원대 펀드 사기를 일으킨 사모펀드 운용사 옵티머스자산운용의 고문단에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76)가 포함돼 있다.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금융감독위원장(현재 금융위원장)을 맡아 기업구조조정을 지휘했고, 노무현 정부 시절 경제부총리를 지냈다. 과거 ‘이헌재 사단’이란 말이 회자됐을 정도로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잊혀져가던 그의 이름이 옵티머스 고문단에 포함됐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놀랐을 듯싶다.

경향신문

오관철 경제에디터


그를 고문단에 앉힌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유는 짐작이 간다. 투자자들에게는 존재만으로도 수익률을 높여줄 수 있는 인물로 여겨지는 효과를 기대했을 테고 현직 금융당국 인사들에게는 ‘금융계의 대부’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 감안되지 않았을까.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전 부총리가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황은 국감자료와 언론 보도를 통해 나와 있다. 옵티머스의 핵심 인물인 양호 전 나라은행장이 2017년 11월 김재현 옵티머스 대표(구속 기소)와 통화한 녹취록을 보면 “내가 이 전 부총리를 월요일 4시에 만나기로 했는데…”라는 대목이 나온다. 김 대표가 금융계 인사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양 회장(양호 전 나라은행장)은 이헌재 장관 친구이고 그분이 금감원장과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이다 보니…”라고 언급한 사실도 확인됐다. 59개 상장사가 옵티머스펀드에 많게는 100억원 이상 돈을 넣은 사실도 ‘보이지 않는 손’ 없이는 설명이 어렵다. 각종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금융위를 상대하려면 든든한 배경이 필요했을 것임은 그리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전 부총리의 불법 행위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쯤되면 옵티머스 사태를 통해 한국금융의 어두운 그림자를 떠올리게 된다. 끈끈한 유대감과 이익공유로 뭉친 금융권력, 오래전부터 회자돼 온 ‘모피아’의 존재다. 나아가 2015년 금융위가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사모펀드 규제를 완화한 사실이 어떤 거대한 계획의 산물 아니냐는 의구심까지 든다. 당시 금융위는 사모펀드 개인 투자 최저한도를 5억원에서 1억원으로 낮추고 사모펀드 운용사를 인가제에서 등록제로 변경하는 등 규제수위를 대폭 낮췄다.

금융소비자 보호보다 금융산업의 발전 자체를 중시하고, 금융산업 활성화의 주요 수단으로 규제완화를 선호할 때 후유증은 시간이 흘러 나타나기 마련이다. 정책결정 과정에 금융계 곳곳에 마블링처럼 박혀 있는 전직 관료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은 열려 있고, 앞으로 어떤 스캔들이 또 터질지 모른다. 지금도 금산분리 완화 등 규제완화를 주장하는 전직 금융관료가 적지 않다.

반관반민의 금감원은 공무원 조직은 아니나 사실상 금융위와 형제 격이다. 금감원의 예산과 인력은 상급기관인 금융위가 결정하고 금융위 인사들이 금감원 수석부원장으로 가는 건 인사 코스다. 그럼 금융검찰로 불리는 금감원은 어떠했나. 수익률을 최고 가치로 두는 사모펀드의 관련 규제를 완화하면 감독을 강화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럼에도 책임을 방기한 금감원은 사실상 허수아비였다. 1조6000억원대 환매 중단을 초래한 라임자산운용 사태는 투자자 피해를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 금융계 인사는 “지난해 2월 해외무역금융펀드 운용과정에서 라임자산운용의 이상한 낌새를 포착, 라임 측에 자산운용 상황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자본시장법상 금지돼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상하다 싶었고 결국 라임펀드 판매를 중단했다”고 말했다. 라임 측의 펀드 돌려막기 의혹은 언론에도 보도됐지만 금감원은 적기에 대응하지 않았다. 뇌물을 받고 금감원 조사 보고서 일부를 라임 측에 전달한 사람은 청와대에 파견돼 있던 금감원 팀장이었다. 금감원 전직 국장은 옵티머스 측에 금융계 인사를 소개해주는 대가로 수천만원대 금품을 받은 혐의로 검찰 압수수색을 받았다. 이들에게 금품이 건네졌다면 브로커 역할을 기대함과 동시에 금감원 내 조력자를 확산시키려는 범죄자들의 음흉한 계획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전·현직 금감원 인사들의 유대는 금융회사들이 금감원 출신을 감사 자리에 앉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금융과 관련된 일들은 비밀리에 추진되는 경우가 많고 인맥에 의해 시스템이 무력화될 개연성이 크다. 로비와 이권이 개입되면서 금융권력자들 간 짬짜미가 활개를 칠 여지가 넓다. 얽히고설킨 금융권력의 카르텔을 허무는 것이야말로 라임·옵티머스 사태가 요구하는 시급한 해결과제다.

오관철 경제에디터 okc@kyunghyang.com

▶ 인터랙티브:난 어떤 동학개미
▶ 경향신문 바로가기
▶ 경향신문 구독신청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