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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김별명 별명 고맙습니다, 은퇴 타석? 다른 선수 기회 안뺏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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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는 내 자존심이자 자부심…우승하겠단 팬들과 약속 지키지 못해 죄송"

“안녕하십니까. 한화 이글스 김태균입니다.”

유니폼이 아닌 회색 정장을 입고 자리에 앉은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가슴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목메어 물 한 모금을 마셨지만, 한번 문을 열고 들어온 감정은 댐 수문을 박차고 나오는 물길처럼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켰다. 이번엔 눈물이 흘렀다. 멈추지 않았다. 손으로 눈물을 훔치던 그는 구단 직원에게 손수건을 받아 눈 주변을 닦아야 했다.

첫 마디 후 3분쯤 지나 나온 말은 “죄송하다”였다. 그래도 말을 잇지 못했다. 눌러보려는 감정이 자꾸 올라오는 듯했다. 그도 고개를 들어 허공을 쳐다봤다. 그렇게 2분이 또 지났다.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수 있는지 확인한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20년 동안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셨던 한화 팬 여러분께 정말 감사했다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프로야구 한화의 프랜차이즈 스타 김태균(38)의 은퇴 기자 회견이 22일 오후 대전 한화이글스파크 1층 홍보관에서 열렸다. 정민철 단장과 최원호 감독 대행, 주장 이용규로부터 꽃다발을 차례로 받을 때부터 김태균의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조선일보

한화 김태균이 22일 오후 대전 한화이글스파크에서 은퇴 기자 회견에서 눈물을 닦는 모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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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북일고를 졸업하고 2001년 한화에 입단해 신인왕에 오른 김태균은 2010~2011년 일본 프로야구 지바 롯데 말린스에서 뛴 것을 제외하곤 올해까지 18시즌 동안 한화에서만 뛰었다. 그는 2014경기에 출전해 통산 2209안타(역대 3위), 출루율 0.421(역대 2위), 타율 0.320(역대 5위), 311홈런(역대 공동 11위)을 기록했다. 그는 지난 21일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싶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김태균은 “감사할 분이 너무 많아서 먼저 인사를 드리겠다”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항상 선수들에게 도전 정신 일깨워주신 구단주 한화 김승연 회장님, 신인 시절부터 보살펴주신 한화 이글스 역대 감독님들과 사장님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며 “힘들 때 언제나 최선을 다해 도와주신 여러 코치님에게도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와 함께 땀 흘렸던 선수들도 정말 고맙다. 앞으로도 한화가 강팀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내줬으면 좋겠다”며 “어린 시절부터 모든 걸 희생하시고 아들을 키우신 부모님, 집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고생했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중간 중간 끊겼다.

“충청도 천안 출신이기 때문에 항상 한화 야구를 보면서 운동했습니다. 한화 선수라 너무 행복했습니다. 한화 이글스는 저의 자존심이었고 자부심이었습니다. 한화 유니폼을 입고 뛰게 된 것은 제게 큰 영광이었습니다. 이제 그 유니폼을 벗는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착잡한 것도 사실입니다. 매년 시즌 시작하기 전 팬들에게 올 시즌은 좋은 성적으로 보답하겠다고, 팬들과 우승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 약속을 한 번도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평생 한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김태균은 ‘죄송하다’고 말할 때 다시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닦은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는 “후배들이 제 한을 풀어줬으면 좋겠다. 우리 팀에는 젊고 유망한 선수가 많다. 언젠가 강팀이 될 수 있단 희망을 갖게 됐다”며 “후배들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후배들이 제가 이루지 못했던 우승을 이뤄주기 바라는 마음에 은퇴를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취재진과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했다. 아쉬움이 많이 남을 것 같다.

“사실 그땐 어렸다. 좋은 선배들이 이끌어주셨기 때문에 당시에는 한국시리즈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지 못했다. 그땐 우리가 강팀이라서 언제든지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대를 했다. 하지만 (프로 생활을 하면서) 우승 기쁨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깨닫게 됐다. 후배들에게 (우승) 기회가 쉽게 오지 않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얘기를 했다.”

-유난히 별명이 많은데, 팬들에게 야속한 마음은 없었나.

“야속하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팬들이 많은 별명을 지으면서 재미있어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안 좋은 별명도 있었지만 팬들의 관심과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부족한 부분도 있었다. 이젠 별명도 들을 수 없단 생각이 드니 슬프다.”

-가장 기억에 남는 별명이 있나.

“너무 많다. 덩치가 크고 느릿느릿한 이미지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엔 ‘김질주’란 별명이 마음에 들었다. 팀의 중심 선수가 된 후로는 ‘한화의 자존심’이 좋았다.”

-올 시즌 앞두고 1년 재계약했다. 은퇴를 결심한 시기는 언제였나. 계기는 있었나.

“작년에 1년 재계약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납득할 수 있는 성적을 못 내면 결단을 내리겠다고. 팀에 부담이 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1년 계약하고 20대 시절보다 운동량을 늘렸다.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해보다 준비를 열심히 했다. 올 시즌 개막 후 얼마 되지 않아 2군에 내려갔을 때 많은 생각을 했고, (은퇴) 준비를 했던 것 같다. 8월에 다시 2군으로 가면서 마음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서산구장에서 유망한 젊은 선수들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결심했다.”

-은퇴 결심하고도 서산 구장에서 계속 훈련한 이유.

“서산 야구장은 젊은 선수들이 열심히 준비하는 곳이다. 1군 무대에 서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준비하는지 잘 알고 있다. 선수들 집중력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평상시처럼 운동했고, 후배들과 맛있는 것 먹으러 다녔다. 후배들이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잘 대답하려고 했다. 제 머릿속이 복잡해서 쉽지는 않았지만, 은퇴 결심한 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팀의 중심 타자인데 장타보다 정교한 타격과 출루에 중점을 뒀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아웃되는 것을 싫어했다. 배트에 공이 안 맞으면 크게 실망했다. 투수가 상대하기 꺼리는 타자가 되고 싶었다. 프로에 와서도 그런 부분에 집중해서 훈련했다. 홈런이 많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좋은 타자 기준에 맞춰서 지금까지 운동했다. 성적이나 타격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화의 포스트 김태균은 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마음속으로는 생각하는 선수는 있지만 말하지 않겠다. 모든 후배가 포스트 김태균이 돼서 한화가 최강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기록이 있나.

“기록을 의식하면서 뛰지는 않았다. 300홈런, 2000안타, 1000타점을 이룬 게 가장 뿌듯하다. 연속 출루 기록도 기억에 남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안타는.

“신인 때 처음 친 안타가 홈런이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아버지가 TV로 보시다가 우셨다.”

-당시 고(故) 하일성 해설위원이 “이 선수 큰 선수 되겠다”고 했는데.

“정말 감사하다. 주변에서 기대와 관심이 많았는데, 제가 보답을 하지 못한 것 같다. 저도 안타깝지만 사람 일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남들이 볼 땐 그냥 야구 잘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겉모습과 다르게 예민해서 다음날 경기 준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들보다 더했다. 20년 동안 프로 선수로 활동하면서 후회가 남지 않을 정도로 노력했지만 주변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죄송하다.”

-올해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을텐데 아쉬울 것 같다.

“모든 선수가 선수 생활 마지막도 잘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 개인 성적뿐만 아니라 팀도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하는 멋진 상황을 꿈꾼다. 이승엽 선배와 박용택 선배 같은 마무리를 꿈꾸고 기대했다. 하지만 상황이 달랐다. 두 선배는 워낙 뛰어난 선수라서 가능했다. 현 상황에선 이게 최선의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팀 상황을 볼 때 내가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은퇴 후 어떤 걸 해보고 싶나.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야구를 해서 야구만 바라보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아무것도 모를 때 아버지가 야구를 시켰는데 그땐 친구들과 뛰어놀고 싶었다. 야구 안 한다고 집에 가는 일도 있었다. 방황하는 저를 당시 감독님과 아버지가 잡아주셨다. 중학교 올라가면서부터는 어쩔 수 없이 이길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야구 생각만 했다. 부모님이 외진 곳에 실내 연습장을 지어주셔서 훈련했다. 아버지는 스윙을 1000개씩 안 하면 잠을 못 자게 할 정도로 관심이 많으셨다. 그래서 해보고 싶은 게 많다. 한화가 좋은 팀이 될 수 있도록 제가 공부할 것도 많다고 생각한다.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해서 뭘 배우고 준비할지 정하겠다. 제2의 인생이 기대된다.”

-1982년생 또래 선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친구들에게 머리가 복잡하거나 마음이 불편해지는 상황을 만들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친구들은 제가 하지 못한 ‘멋있는 마무리’를 했으면 좋겠다. 대표팀에서 서로 의지를 많이 했다. 좋은 추억도 많았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은퇴를 반대하지 않았나

“제가 예민하고 스트레스 많이 받는 성격이다. 아내는 제 의견을 존중해주고 수고했다고 얘기했다. 친한 지인 중에는 ‘더할 수 있는데 왜 그러느냐’며 아쉽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제가 ‘최선의 결정’이라며 설득하는 분위기였다.”

-선수 생활에 점수를 매긴다면.

“30~40점 정도 되는 것 같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점수를 매겨선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팀의 주축 선수로서 우승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많이 줄 수 없을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지도자 3명만 꼽는다면.

“신인 때부터 야구뿐만 아니라 여러 도움을 주면서 동생처럼 아껴주셨던 이정훈 전 한화 2군 감독님, 개인 훈련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셨던 김인식 전 감독님, 제가 안주하지 않고 한 번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지도해준 김성근 전 감독님이 기억에 남는다.”

-처음 기자 회견할 때 눈물을 흘렸는데 어떤 생각이 들었나.

“처음 혼자서 은퇴를 결정했을 땐 담담했다. 열심히 했기 때문에 후회하는 것도 없었다. 별다른 감정이 안 생겨서 별 것 아니구나 싶었는데 막상 여기 오니까 현실로 다가온 것 같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큰 관심 받을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랬던 것 같다.”

-영구 결번에 대한 생각은.

“구단과 관계자분들이 결정하시는 것이다.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사실 저보다 더 훌륭한 선수도 많다. 뛰어난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구단과 상의할 것이다.”

-팬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나.

“어떻게든 기억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 저는 김별명이란 게 있으니깐 어떤 식이라도 팬들에게 오래 기억이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

-보이지 않는 선행도 많이 했는데.

“저희는 팬들의 사랑으로 사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엔 야구만 잘하려고 노력했다. 팬들의 소중함을 잘 몰랐다. 프로 생활을 오래하면서 팬들의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어린 선수들은 아직 모를 수도 있는데, 빨리 깨달아서 거기에 맞게 자기 관리를 하고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단장 보좌역으로 활동하게 됐는데

“구단에서 뭔가를 추진하고 바꾸려고 할 때, 선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을 전달해 팀에 보탬이 되도록 하겠다. 그걸 위해 공부도 많이 하겠다.”

-많은 팬이 한 타석만 더 섰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럴 생각은 없다. 구단에 은퇴 의사 전달했을 때 구단에서도 그런 부분을 제의해 주셨다. 제 개인적으로 소중한 한 타석일 수 있다. 하지만 저보다 더 간절하게 타석에 서길 원하는 선수들이 있다. 제가 마지막 가는 길에 선수들의 소중한 기회를 뺏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 결정을 번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 대신 타석에 서는 선수가 좋은 결과를 냈으면 좋겠다.”

[송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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