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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휴일 밤 증거 없앤 산업부… 이래도 공복이라 할 수 있나 [현장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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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원전 관련 감사받던 공무원들

있는 자료 없다고 거짓말 할 수 없어

보고서 등 444개 자료 삭제했다니…

피감기관의 조직적인 감사 저항

관료사회의 정치화 단면 드러내

세계일보

정부세종청사에 위치한 산업통상자원부 원전산업정책관실. 감사원은 지난 20일 산업부가 2019년 감사를 앞두고 사무실 컴퓨터에 저장된 월성 1호기 관련 자료 444개 파일을 삭제했다고 밝혔다. 뉴스1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이 월성 1호기 조기폐쇄 결정에 대한 감사원 감사에 조직적으로 저항했던 사실이 감사 결과 드러났다. 피감기관 공무원으로서 정도를 벗어난 행위다.

감사위원 면담 전날 청와대 보고서와 증거자료 등 파일 444개를 모두 삭제했다. 이 중 120개는 끝내 복구하지 못했다. 감사원이 월성 1호기 경제성이 불합리하게 낮게 평가됐다고 결론을 내렸으면서도 조기폐쇄 타당성 여부를 판단하지 못한 것은 이런 산업부 공무원들의 조직적인 감사 방해 행위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드러난 감사 저항과 자료 은폐 수법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마치 첩보 액션 영화 ‘007’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한다. 지난해 11월 감사원 감사 사실을 통보받자, 산업부 공무원들은 대응책을 논의하고, 면담 하루 전날인 12월 1일 일요일 밤 11시가 넘어 사무실에서 자료를 삭제했다. 단순 삭제는 복구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 다른 내용을 첨부한 뒤 파일과 폴더 자체를 지우는 수법을 사용했다. 이렇게 주도면밀하고 조직적으로 증거은폐 시도가 진행됐다. 삭제 작업은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최재형 감사원장이 “저항이 굉장히 많은 감사였다”고 넋두리를 늘어놓았을까.

산업부 직원의 해명은 더욱 기가 막힌다. “감사원에서 관련 자료를 요청할 경우, 자료가 있는데도 없다고 하면 마음에 켕길 수 있다고 생각해 자료를 제출하지 않기 위해, 또 자료가 없다고 답변하려고 없앴다”고 감사원에 밝혔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감사원 면담에서 정확하고 제대로 답변을 하면 될 일이다. “자료가 없다”고 말하기 위해 자료를 없앴다는 이 직원의 해명은 경찰서에 붙들려 온 범법자가 뻔한 잘못된 행위를 한 뒤에 발뺌하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고도 본인이 국민의 ‘공복’(公僕)이라고 자신할 수 있나. 스스로 범죄집단으로 전락한 것처럼 느껴져 안타까울 뿐이다.

세계일보

이우승 정치부 차장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관료 사회의 급격한 정치화다. 지금 우리 정치는 편 가르기와 정쟁으로 극도로 혼란한 상황이다. 국가 운영의 근본은 법치이며, 그 중심에는 세금으로 녹을 먹는 공무원이 있다. 우리나라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전 정권의 정책에 대한 지나친 감사와 비판이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됐다. 공직 사회는 상관의 부당한 지시에 대한 근거 자료와 절차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당연한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이번 산업부의 집단저항은 단순하지 않다. 들여다볼 근거자료 자체를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삭제된 자료에는 문재인정부 ‘탈원전’ 정책을 흔드는 자료가 담겨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원천 봉쇄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자료가 온전히 감사원에 넘어갔다면 탈원전 정책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검토됐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할 에너지 정책은 5년 임기의 정권 차원에서 다뤄질 문제가 아니다. 국익 차원에서 탈원전이 맞다면 그 길로 가야 하겠지만 주무 부서가 관련 자료를 삭제하면서까지 밀어붙이는 방식으론 안 된다. 국익에 봉사해야 할 공무원들이 정권의 충복으로 전락한 셈이다. 심각한 공직 사회 정치화를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21일 “감사를 방해하고, 직권을 남용해 공용 서류를 손상한 관련자들을 모두 형사고발하겠다”고 말했다. 감사원도 관련 공무원 2명의 징계를 요청했다.

피감기관 공무원의 의무를 벗어난 행위에 대해서는 일벌백계해야 한다. 이들의 조직적인 방해와 은폐에 관여한 또 다른 인사가 있다면 이 또한 반드시 밝혀내야 할 일이다. 외압이나 정치권 개입으로 처벌이 흐지부지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이번과 같은 일은 얼마든지 되풀이될 수 있다.

이우승 기자 ws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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