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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MHN과학] 20대에 요절한 두 천재 수학자, '아벨'과 '갈루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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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뉴스



[김종민 기자]

[문화뉴스 MHN 김종민 기자] 예술가들은 생전 힘들게 살다가 세상 떠나서야 그 빛을 보는 경우가 많다. 학문의 세계에도 그런 사례가 많지만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요절한 까닭에 사는 동안 빛을 보지 못한 경우다. 타고난 천재로 짧은 생애 수학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20대에 세상을 떠난 두 천재 이야기를 소개한다. 아벨과 갈루아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요절한 수학자다.



■ 교수 임명 직전에, 병으로 세상 떠난 '닐스 헨리크 아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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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헨리크 아벨
출처: 오슬로 대학


아벨은 '5차 방정식'의 일반해가 없음을 증명한 수학자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2차, 3차 방정식에 대해서 배우는데, 근의 공식은 누구나 외운적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배운 근의 공식은 2차 방정식에 해당한다. 3차 방정식도 근의 공식이 있지만 너무 복잡해 보통은 외우지 않는다. 그런데 5차 방정식은 근의 공식이 있을까? 5차 방정식은 근의 공식이 없다. 그것을 논리로 증명한 수학자가 아벨이다.


아벨은 초기에는 이 근의 공식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쉽게 해결되지 않자 근의 공식이 없다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그런데 이 증명 과정에서 당대 기준으로 너무 추상적인 개념을 도입하는 바람에,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다. 가난했던 그는 자비로 논문을 출판해 생활고에 허덕였다. 그는 힘들게 출판한 논문을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인 '가우스', '오귀스탱 코시' 등 에게 보냈다. 그런데 코시는 아벨의 논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우스는 논문 제목을 오해한 나머지, 아마추어의 논문이라 생각해 무시했다.


아벨은 19세에 아버지를 잃고 가난에 시달렸다. 그 결과 결핵으로 투병생활을 했다. 보다 못한 나머지, 당시 독일 수학자이자 아벨의 친구인 크렐레는 아벨에게 베를린 대학 교수직을 마련해주었다. 교수직 임명장은 아벨이 죽은 뒤에서야 도착하고 말았다. 아벨의 나이 2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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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상, 사진 제공= 아벨상


아벨의 수학적 업적은 뒤늦게 주목 받았다. 아벨이 도입한 추상 대수학은 오늘날 수학 전반에 사용된다. 그의 '아벨 군(Abelian group)'은 오늘날 학부 수학과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노르웨이에서는 2001년에 '아벨상'을 지정했다. 수학계의 권위 있는 다른 상인 '필즈상'에 버금가는 상이며 필즈상는 달리 나이제한이 없고, 응용수학 분야도 인정받는다.



■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한 '갈루아'


갈루아는 프랑스 혁명과 함께하고, 권총 대결로 요절한 수학자다. 갈루아는 아벨과 유사한 주제에 관심을 가졌다. 갈루아의 업적은 방정식을 풀기 위해서 추상적인 개념인 '군(Group)'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아벨의 업적인 '5차 방정식 근의 공식이 없음'도 현대에는 군으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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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루아
​​​​​​​출처: 아인트호벤 대학


갈루아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부터 천재적인 면모를 보였다. 15살에 그는 다른 수학자 '르장드르'의 전문 서적을 2일 만에 읽었다고 한다. 이 책은 전문 수학자들을 독자로 상정해 2년간 읽도록 쓰인 것이었다. 대단한 수학적 재능을 지닌 갈루아는 수학 외에 다른 것에는 무관심했다. 동급생이나 심지어 선생님조차 지적으로 열등하다며 무시했고, 다른 과목들은 낙제를 받았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수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상급 학교인 '에콜 폴리테크니크'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의 불운은 시작이었다. 프랑스 혁명에 휘말려 부친이 사망하고, 입학시험에서 낙제하게 된다. 갈루아는 수학 외에는 낙제 점수였던데다가, 면접에서 오만한 태도로 일관했다. 자신의 뛰어난 실력을 모른다고 생각해, 면접관을 무시했다. 갈루아는 아벨이 했던 것처럼 코시에게 논문을 보냈다. 코시는 관심을 보였으나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갈루아는 프랑스 왕립과학원에 논문을 또 보냈으나, 이번에는 논문이 분실되고 말았다.


에콜 폴리테크니크 대신 예비학교에 입학한 그는, 학업보다 정치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학교에서 막자, 그가 다니던 학교의 교장을 비난하는 글을 써 퇴학당한다. 이후 유명 수학자인 '푸아송'과 만나기도 했으나, 정치 혁명 활동으로 인해 푸아송과 오해가 생겨 다시금 그의 논문은 버림받게 된다. 그동안 갈루아는 혁명의 유명 인사로 주목받아 투옥당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갈루아는 피투성이로 쓰러진 채 발견된다.


그가 쓰러진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자신이 다니던 병원의 여식 '스테파니'를 두고 결투를 벌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배에 총알이 박힌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갈루아는 생전 많은 결투를 치렀다는 것도 설에 무게를 더한다. 그는 죽기전 동생에게 '나이 스물에 죽으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며 유언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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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루아의 추상 수학 이론


사후에야 갈루아의 업적은 주목을 받았다. 앞서 아벨의 사례처럼, 갈루아의 '군론'은 오늘날 모든 수학과에서 배우는 내용이 되었다. 또 갈루아 사후에 가우스는 비운의 천재들이 묻힐까 우려해 자신에게 온 편지들을 보다 잘 검토했다고 한다. 천재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입시 제도도 바뀌게 된다. 다른 과목에서 점수가 낮더라도, 재능이 있다면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 제도의 수혜자가 천재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다. 푸앵카레는 20세기 수학사 최대의 난제를 제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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