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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독재정권에 맞서…총 대신 예술로 민주주의를 지키다 [여성, 정치를 하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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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나 메르쿠리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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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나 메르쿠리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정치가 필요하다”는 믿음을 가진 정치인이자 예술가였다. 문화와 예술로 군사정권에 맞섰고, 약탈 문화재 환수는 물론 ‘민주주의라는 그리스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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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내가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그리스, 그런데도 그리스의 바다, 그리스의 언덕, 그리스의 태양 그리고 그리스의 산등성이에 부딪혀 반사하는 그 찬란한 햇살을 나는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리스에 돌아갈 수 없는 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쓰고 있다. 이 이야기는 나에 관한 일,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일이다. 그리스와 그 정치 이야기, 외국의 지배라든가 외국의 지배 세력에 이용된 비열한 정치가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다가 수없이 좌절한 우리들 그리스 국민의 이야기를 쓰려는 것이다.”

1967년 4월, 그리스의 대령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1960년, 40세에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로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인 배우로 이름을 떨친 멜리나 메르쿠리는 1967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군대가 그리스를 점령해 버렸다”는 소식을 미국에서 듣고 현기증이 났다. 약 1년 전, 멜리나 메르쿠리는 한 파티에서 “악명 높은 극우파” 니코스 파르마키스와 마주쳤던 기억을 떠올렸다. 대뜸 “멜리나, 나는 파시스트인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럽습니다. 유행이니까요. 우리 편에 가담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 정치의 주도권은 우리가 잡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를 “천치와도 같은 자”로 치부했던 자신의 안일한 태도와 어리석음을 자책했다.

메르쿠리는 배우이자 가수로서
문화와 예술의 파급력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그리스 민주주의의 위기를 수수방관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리스의 지인들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대사관은 단호하게 통보했다. “그리스와의 교신은 안 됩니다.” 라디오에서는 “그리스는 부활되었다. 참다운 자유가 도래했다”는 거짓 프로파간다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깡패 같은 군인 패거리”는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일순간에 파괴시켰다. 그들은 바로 학교를 폐쇄하고, 일체의 집회를 금지시켰다. 예금 인출 및 야간 통행도 통제했다. 누구라도 법적 절차 없이 체포될 수 있었다. 전 국민에게 상시적인 압수수색과 더불어 모든 언론에는 검열이 적용된다는 골자의 선언문이 배포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교활했다. 그들은 멜리나 메르쿠리를 선전 도구로 이용하고자 했다. 군사정권이 발행한 신문에 그녀의 뉴욕 진출 소식이 실렸다.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었다. “우리의 멜리나!”라는 축하 기사가 그녀의 사진과 함께 “버젓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우리”라는 단어에 모멸감을 느꼈다. 불면의 밤들이 이어졌다. 결단을 내렸다. “나는 내 의견을 말하고 군사정권을 탄핵하고 그들을 괴롭혀 줄 수 있는 일을 해야만 되겠다.”

언론 인터뷰를 할 때마다 “그리스의 몇몇 섬에는 감옥이 있는데 거기서는 고문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그리스에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군사정권에 반대합니다”라고 국제사회에 쿠데타 세력들을 고발했다. 협박 전화와 편지가 쇄도했다. “귀가 찢어질 듯이 큰 목소리! 그 내용은 매춘부 같으니! 공산주의자의 매춘부!” 가짜뉴스도 떠돌기 시작했다. “여배우 멜리나 메르쿠리와 그녀의 유태인 남편은 미국 공산당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고 있다.” 사실무근이었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텔레비전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적극적으로 방송에 출연했고, 여러 대학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가졌다.

1967년 7월12일, 영국 신문기자가 전화를 걸어 왔다. “멜리나 메르쿠리, 그리스의 내무부 장관 파다코스는 당신이 그리스 국민의 적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당신의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국적도 박탈되었습니다.” 기자는 그녀에게 “무슨 할 말이 없습니까”라고 질문했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나는 그리스인으로 태어나서 그리스인으로서 죽겠습니다. 파다코스는 파시스트로 태어나 파시스트로 죽겠지요.” 멜리나 메르쿠리는 그리스에서 추방되었지만, 위축되지 않았다. 멜리나 메르쿠리의 발언은 미국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뉴욕의 여러 가게에서 ‘멜리나는 그리스인이다’라는 슬로건이 든 배지가 팔리기 시작했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그리스 민주화운동 특집기사를 실었다.

군사정권의 폭정은 더욱 악랄해지고 있었다. 민주화운동 인사들은 수감되거나 가택 연금을 당했다. 의문사도 늘어갔다. 그러나 그리스에는 “악마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천사도 존재했다”. 보수 성향 언론사 사주였던 헬레니 부라고스는 “자기의 신문을 모두 폐간해버리는 쪽을 택했다”. 그녀는 “자택 구금 상태”에서 “대담하게 영국으로 탈출하여”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정치적 지향점은 달랐지만, 진정한 보수 언론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신중하게 검토했다. “범(凡)헬레니즘 해방전선”에 참여했다. “최대의 굴욕은 자기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공포심이다. 그 공포심은, 총을 가지고 자기들을 억압하는 자들을 타도할 수가 없다는, 바로 그곳에서부터 비롯된다.” 총을 든 자들에게 총으로 맞서는 대신, 문화와 예술로 사람들의 공포심을 잠재우고 민주주의의 정신을 되살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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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나 메르쿠리는 총을 든 자들에게 총으로 맞서는 대신 문화와 예술로 민주주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했다. 위 사진부터 메르쿠리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의 한 장면, 1955년 칸영화제에 참석한 멜리나 메르쿠리, 그리스 군사정권 몰락 후 국회의원으로 선출돼 의정활동을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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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나 메르쿠리는 파리로 망명한 후, 유럽 전역을 다니면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스웨덴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그리스어로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배우이자 가수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예술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예술은 정치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그녀를 압박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문화와 예술의 파급력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스위스 로잔에서는 군부독재에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국제적인 연대를 시도했다. 1970년에는 자서전 <나는 그리스인으로 태어났다>를 출간하며, 그리스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과 저항운동의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도 겪어내야 했다.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접했다. 속수무책이었다. 군사정권과의 불화로 그리스 입국이 불가능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는데도 나에게는 울 틈도 없었다. 나는 공연을 끝냈다. (…) 아무도 무대 뒤에 오지 못하게 했다. 들어온 것은 오직 하나, 이탈리아인 친구이며 저널리스트인 오리아나 팔라치뿐이었다. 오리아나는 ‘아버지의 영혼이에요’ 하고 아름다운 식물을 가져다 주었다.” 우정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정치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하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정치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그리스의 유산을 지키자고
당부했다

1974년, 군사정권이 몰락했다. 7년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멜리나 메르쿠리는 그리스로 돌아갔다. 진보진영 결집에 나섰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그리스에서 가장 낙후되고 가난한 지역인 피레우스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33표 차로 낙선했다.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냈다. 1977년, 멜리나 메르쿠리는 전국 최다 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4년 후인 1981년에는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여배우가 장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론을 조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침묵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삼류배우만 되어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데 그리스의 유명 여배우가 문화부 장관이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문화부 장관에 취임한 멜리나 메르쿠리는 아크로폴리스로 가는 길을 보행자 전용도로로 만드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리스 문화의 자부심이자 민주주의의 출발점인 아크로폴리스로 향하는 길. 멜리나 메르쿠리는 아테네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아크로폴리스까지 직접 걷는 경험을 선사하고 싶었다. 걷는 속도와 방식은 오로지 개인에게 달려 있었다. 각자의 보폭으로 자유롭게 걷다보면 민주주의가 조금씩 성장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문화부 장관으로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수만은 없는 형편이었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영국이 1801년 약탈해간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 ‘엘긴 마블스(Elgin Marbles)’를 그리스로 되찾아 오고자 국제사회에 파문을 던졌다. 문화재 반환운동을 적극 주도했다. 영국이 그리스의 박물관 수준을 문제 삼아 반환을 거부하자, 멜리나 메르쿠리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건설을 위해 국제 설계 공모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의 거절 사유는 핑계에 불과했다. 제국주의 문화 정책을 일관되게 비판한 멜리나 메르쿠리는 유럽연합(EU)에 “유럽 문화수도”를 건의한다. 1985년 6월 EU는 유럽 문화수도를 공식 행사로 즉각 채택했다. 1986년 그리스 아테네는 첫 유럽 문화수도로 선정되었다. 문화를 통한 유럽 통합과 상호교류를 목표로 한 멜리나 메르쿠리의 ‘문화축제’는 매해 ‘수도’를 이전하며 현재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1989년까지 8년 임기 동안 문화부 장관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멜리나 메르쿠리는 배우 시절 이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1993년에는 문화부 장관 복직 요청을 받을 정도로 그녀의 기획력과 추진력은 탁월했다. 1993년 문화부로 돌아온 멜리나 메르쿠리는 에게(Aegean)해(海) 문화공원 조성을 추진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다. 폐암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94년 3월, 멜리나 메르쿠리는 뉴욕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스의 모든 방송은 정규 프로그램을 잠시 중단하고, 멜리나 메르쿠리의 죽음을 슬퍼했다. 한편, 수백만명의 아테네 시민들은 그녀의 장례식을 위엄 있는 축제로 만들었다. 멜리나 메르쿠리가 “고통 없는 신의 나라”로 편안하게 떠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그리스인들의 방식으로 건넸다.

그리스 국민들은 그녀를 ‘인간적인’ 정치인으로 기억한다. 합당한 평가이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하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정치가 필요하다”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그리스의 유산을 지키자고 당부했다. 그녀는 무엇이든 쉽게 단념하지 않았다. “내가 죽기 전에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이 돌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내가 죽은 후에라도 그리스의 유산이 원위치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나는 잠시 무덤 밖으로 나올 것이다.” 2019년 8월31일, 키라이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는 영국 옵저버와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조각상 반환 요구는 변함이 없다. 영국은 결국 이 전쟁에서 지게 될 것이다. 압박은 고조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옥스퍼드대 재학 시절이던 1986년 이미 멜리나 메르쿠리 장관과 문화재 반환을 주제로 공개 토론을 가진 바 있었다. 귀추가 주목된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그리스의 문화를 지키고 있다. 문화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장영은

경향신문
성균관대학교에서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장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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