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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스타트업은 ‘남의 일’이라 생각했던 어느 ‘포닥’ 창업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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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뱃 코파운더 (왼쪽에서 두 번째) 허인영 대표 / 사진=허인영 대표 발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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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에서 창업과 취업을 경험한 한국인의 이야기를 듣는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2020’ 마지막 연사로 허인영 밀리뱃 대표가 온라인 무대에 섰다.

허인영 대표는 미국에서 박사를 마치고 포닥(박사후 연구원) 생활을 하다 기술 스타트업을 설립한 창업자이다. 그가 2015년 창업한 밀리뱃은 소형 디바이스에 들어가는 작고 성능이 높은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다.

허 대표는 창업을 면밀하게 준비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다. 창업을 결심하고나서 생태계 동향을 배웠다. 그는 “창업은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누가 “창업을 할거냐”라고 물어보면 “안 한다”라고 답한 적도 있다. 하지만 어느날 내 아이디어를 창업이란 형태로 키워보는 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런 기회가 인생에 언제 다시 오겠나. 그래서 해보기로 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창업 전과 후의 변화로 의사 결정 부분을 들었다. 허 대표는 “석사, 박사, 포닥까지 8년간 실험과 근거를 바탕으로 최대한 신중하고 보수적으로 결정하는 훈련을 했다. 하지만 창업 이후에는 정 반대로 제한된 정보만으로도 빠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잦았다.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그때 “빠르게 내리는 나쁜 결정이 결정을 미루는 것보다 낫다”란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생각해보니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으면 피드백도 없는 것 아닌가. 이후에는 이를 항상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하 허인영 대표 발표 내용 전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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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배터리 회사를 창업했냐고? “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는 박사과정을 하러 왔다. 클린룸에서 연료전지를 디자인하고 만드는 연구를 하며 배터리와 전기화학을 더 알고싶었다. 그래서 포닥(박사후 연구원)을 재료과로 갔고, 회사 코파운더인 릴랜드와 함께 프로젝트를 하게됐다. 박사지도 교수와 포닥 지도교수는 20년 이상 UCLA에서 ‘3D 마이크로 배터리’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그 프로젝트에 후일 회사를 공동 창업한 릴랜드를 만난다. 둘이서 1년이 채 되지 않은 상황임에도 3D 마이크로 배터리를 양산할 수 있는 재조공정을 개발하게 되어 특허를 냈다. 당시 UCLA와 특허미팅을 하는데 학교 IP를 담당하는 직원이 “창업할거냐(Are you going to start a company)”고 묻더라. 우리 두 사람은 ‘아니’라고 답했다. 그때만해도 나나 릴랜드는 박사를 마치고 회사에 취업하거나 연구소쪽으로 갈 계획이었다. 창업은 우리와 관계없는 이야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연구소, 반도체 회사, 배터리 스타트업까지 다양한 직업군 인터뷰를 했는데, UCLA 특허 미팅 때 들었던 말이 계속 뇌리에 남았다. 창업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오후 한산한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면서 릴랜드에게 “창업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배터리 연구도 좋고, 관련 산업군에 남고 싶다. 다른 배터리 아이디어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디어를 창업으로 키워보는 것도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런 기회가 인생에 언제 다시 오겠나. 그런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라고 이야기를 했다. 릴랜드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1년이라는 시간을 부여해보기로 했다.

‘창업’에 대해, ‘스타트업’에 대해 뭘 모르는지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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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서 연구만 했던지라 우리가 뭘 모르는지를 잘 몰랐다. 그래서 학교 네트워크를 통해 투자자, 변호사를 만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고, 만날 때마다 새로운 용어를 배웠다. VC, 엔젤, 액셀러레이터, 피치덱, 전략적 투자, 비즈니스 플랜 등 개념을 미팅하며 알았다. 한 시간짜리 미팅 3개만 해도 지치더라. 그러다 ‘와이콤비네이터(Y-Combinator)’에 지원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들었다. 사실 와이콤비네이터가 에어비앤비나 드롭박스 초기 투자를 한 액셀러레이터라는 것도 이때 처음 알았다. 우리같은 하드웨어 회사에게 와이콤비네이터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마감 전날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지원 양식 중간에 “컴퓨터 시스템이 아닌 실생활에서 라이프 해킹을 성공적으로 한 예를 적으라”는 질문도 있었는데, 그전까지 해킹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한지라 당황스러웠던 기억도 있다.

서류 통과가 되어 인터뷰를 오라는 이메일을 받고 배터리를 챙겨서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비행기 검색대에서 제품을 압수당할까봐 LA에서 마운틴뷰까지 운전해서 갔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숙소를 잡았는데, 각 방마다 와이콤비네이터 인터뷰를 온 지원자들이 가득했다. 우리처럼 처음 지원한 팀, 여러번 지원한 팀, 영국 등 해외에서 온 팀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연구실에만 있었기에 그 모습이 신기했고 새로웠다. 이런게 실리콘밸리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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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 와이콤비네이터 배치에 들어가게 되고 일주일에 한 번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창업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3개월 프로그램을 마치고 마지막에 데모데이를 했다. 500명 규모 투자자들 앞에서 150개 팀이 2분 30초 동안 이틀간 피치를 하는 행사다. 덕분에 비교적 빠르게 초기 투자를 했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우리가 목표로 하는 금액을 바로 투자한다는 투자자를 만나서 놀라기도 했다. 이런 일이 우리한테도 일어날 수 있구나 싶었다. 흥분한 마음으로 무대에서 발표 내용을 잊을 뻔 했다.

투자 유치 이후 밀리뱃에서 풀타임으로 일하게 됐다. UCLA 인큐베이터 공간에서 하이파워 배터리 개발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나는 클린롬에서, 릴랜드는 배터리 테스터가 있는 연구소에 하루 종일 연구만 했다. 그렇게 배터리 개발을 했고 지금은 배터리를 파트너 회사들한테 보내서 테스트를 하는 단계에 와 있다.

그렇게 탄생한 스타트업 ‘밀리뱃’의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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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뱃은 IOT, 바이오매디컬, 커넥티드 소형 디바이스에 들어가는 작고 강한 배터리를 개발하는 스타트업이다. 모든 무선 전자기기는 배터리가 필요하다. 스마트디바이스는 해가 갈 수록 크기가 작아지고 종류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ARM과 소프트뱅크의 자룡에 따르면, 향후 20년 간 인터넷에 연결된 누적 디바이스 수는 1조 개로 예측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IOT디바이스에 들어가는 소형 배터리에 요구가 클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시장 사이즈가 큰 것이다. 하지만 현존 소형 배터리는 시장이 요구하는 스마트 기능의 파워가 부족하다. 배터리가 크기가 작아질 수록 단위 부피당 저장되는 에너지나 파워의 밀도가 현저히 낮아지기 때문이다. 밀리뱃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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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뱃은 작은 배터리에서부터 스마트폰이나 전기자동차에 필요한 에너지 밀도와 파워 밀도를 유지하는 솔루션이다. 이것이 가능한 배경에는 기존 2D구조가 아니라 3D구조를 구현하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높은 파워와 사용시간을 연장하는 배터리를 만들고 있다. 작고, 충전이 가능하고, 강한 파워를 내서 5배 이상 오래가는 효과가 있다. 아울러 다양한 크기와 두께로 맞춤 제작이 가능하다. 이러한 기술은 특허로 보호되고 있다.

소수정예 코파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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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뱃은 작은 배터리를 만들기에 특화된 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이크로 스트럭처를 디자인하고 만드는 기술과 배터리 재료와 전기화학에 대한 이해를 가진 팀이다. 나는 UCLA 기계공학과 멤스(MEMS)랩에서 배터리와 연료전지를 구성하는 마이크로 스트럭처를 디자인하며 직접 클린룸에서 공정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공동창업자인 릴렌드(COO)는 같은 연구소에서 배터리 재료를 연구하는 케미컬 엔지니어이다. 후일 두 명의 VP도 합류했다.

밀리뱃은 UCLA에서 2015년 3월 관련 기술을 개발해 IP를 파일링하고 회사 설립은 그해 말 12월에 하게 된다. 2017년 초에 와이콤비네이터의 배치팀에 선정되고 같은해 3월 처음으로 선보이고 IP도 UCLA로부터 라이센싱한다. 데모데이를 통해 시드투자 유치를 하고 기존 배터리보다 1000배 이상 높은 하이파워 배터리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2019년 초에 UCLA 인큐베이터에서 독립했다. 올초에 프리A 펀딩도 마무리 하고 2세대 배터리 기술 개발도 완료한 상황이다.

연구실을 벗어나 스타트업 창업자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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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을 하자 마자 가장 먼저 겪었던 난항이 UCLA와의 라이센싱 협상이었다. 이 라이센스가 없으면 투자가 어렵고, 투자금이 없으면 라이센스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로열티나 지분 등 다양한 부분에서 협상을 해야했는데, 경험이 없다보니 여러번 위기를 겪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학교가 통상적으로 하는 범위 사이에서 접점이 잘 안 만들어져서 여러번 원점으로 돌아가는 등 어려운 딜이었다. 하지만 보통 1년에서 길면 수년이 걸린다고 하는 라이센스 협상을 6개월만에 우리가 제시한 조건으로 끝냈다.

협상을 하면서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 번째는 협상 테이블 반대편에 앉은 사람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 사람이 자기 조직에서 우리를 위해 설득해 줄 수 있는 자료를 준비해 줘야 한다는 거다. 우리는 다른 배터리 회사가 여타 대학교와 맺은 로열티 구조 등 자료를 제공하기도 하고, 배터리 산업군에서의 마진 구조를 조사해서 주기도 했다. 우리가 비지니스를 하려면 어떤 구조야 한다는 것을 자료와 함께 설득했다.

두 번째는 라이센스 딜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연구소에 오래 있다가 창업을 했기에, 투자자들을 만나면 제일 먼저 공격받는 부분이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이었다. “너희는 아무 경험이 없잖아, 비지니스 경험이 없쟎아” 등 지적이다. 그런데 긍정적인 경험을 한 번 하니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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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결정도 창업 전과 후가 달라졌다. 석사, 박사, 포닥까지 8년간 실험과 근거를 바탕으로 최대한 신중하고 보수적으로 결정을 하는 훈련을 했다. 하지만 창업 이후에는 정 반대로 제한된 정보만으로도 빠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잦았다.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그때 팟캐스트에서 “빠르게 내리는 나쁜 결정이 결정을 미루는 것보다 낫다(Bad decision is better than no decision)”란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틀린 결정을 내리면 바로 망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며 확실해질 때까지 결정을 피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으면 피드백도 없는 것이니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후에는 이를 항상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It’s ok to be your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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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브랜슨이 ‘너 자신 그대로여도 괜찮다(It’s ok to be yourself)’라는 말을 했다. 막연한 의미로 들릴 수 있겠지만, 운 좋게도 나는 창업초기에 이 말을 이해하는 경험을 하게 됐다. 와이콤비네이터 본 데모데이에 앞서 투자 파트너들 앞에서 처음 사업 발표를 한 적이 있다. 발표를 시작한지 몇 분도 되지 않았는데, 한 파트너가 벌떡 일어나서 “너 똑똑한거 알겠고, 기술 좋은거 알겠는데 암울해 보인다. 좀 더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겠니.” 라고 이야기를 하며 그 자리에서 바로 연습을 시키더라. 그래서 이후에 고함치는 느낌으로 스피치도 해 보고, 카리스마 있는 척도 해보고, 여러가지 연습을 했다. 그러다 좀 편안해진 상태에서 한 데모데이 전날 발표에서 “여지껏 한 발표 중에 제일 좋았다”라는 다른 파트너 피드백을 받았다. 그말을 들으며 깨달은 게 “나 아닌 사람인 척 할 때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진다는 것, 진정성있는 자신감을 보여야 사람들이 장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를 깨닫게 되었다. 다른 이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장점

한국의 투자 씬은 기술을 좋아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 투자자들은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다르더라. 만남 전에 우리 논문과 특허도 꼼꼼하게 읽어보고 와서 대화를 한다. 기술 기반 창업에 굉장히 긍정적인 환경이다. 하드웨어도 생태계도 받쳐주는 것 같다.




글: 손 요한(russia@plat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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