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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시선]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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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 계절 가을이 나를 설레게 한다. 사계절 가운데 가장 좋은 날씨가 이어진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맑기 그지없는 날들. 서늘한 아침 공기는 머리를 맑게 해주고 따뜻한 가을 햇볕은 마음을 개운하게 해준다. 선선한 바람은 살갗을 쓸어주며 사랑의 손길을 건넨다. 아름다운 나라 금수강산에 살고 있음을 절절히 느끼는 요즘이다. 걷기 좋은 계절이니 자동차를 타기보다는 자주 걷는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고 주위를 둘러보며 느릿느릿 걷는다. 살아 있음을 느끼고 두 발로 걷고 있음에 감사드리며 눈앞 풍경 속에 깃든다.

경향신문

정석 서울시립대 교수 <천천히 재생> 저자


연구 학기를 맞게 될 내년 봄을 생각할 때 또 설렌다. 학교 보직을 맡으며 평교수 시절의 자유와 여유를 잃어 갑갑했는데 임기를 마치며 시작될 연구 학기를 설레며 기다린다. 3년 전엔 서귀포 한달살이를 했는데, 이번엔 목포에 머물며 아름다운 섬들을 찾아가 걸어볼 생각이다. 1000개가 넘는 신안의 섬들부터 천천히 걸으며 아직 남아 있을 옛 정취와 깊은 맛들을 섬에서 느껴보고 싶다.

장고도 섬마을 공동체의 놀라운 소식도 나를 설레게 한다. 지난해 주민들이 해삼과 전복을 채취해서 거둔 수익 전부를 70가구가 똑같이 나눠 가구당 1300만원씩 배당했다고 한다. 공동작업하고 공동분배하는 덕에 노후에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든든한 복지 시스템을 주민들이 스스로 만들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다. 마을공동체의 희망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뛴다.

서울시 공공자전거 따릉이도 나를 설레게 한다. 2016년 가을에 처음 타기 시작해 4년간 838㎞, 6420시간을 탔다. 출근할 때, 가까이 볼일 볼 때, 식사하러 갈 때, 또 주말에 운동 삼아 따릉이를 탄다. 마일리지 혜택도 있어 2만8000원 1년 정기권을 사는 데 5000원을 할인받았다. 자전거 전용도로도 점점 늘고 있다. 퇴계로의 차선을 줄이고 새로 만든 자전거도로가 최근 개통되었고, 내년 봄에는 청계광장에서 고산자교까지 청계천 양측에 왕복 12㎞ 자전거도로가 열릴 예정이다. 자전거와 보행은 건강한 도시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두 기둥이다. 걷는 시민과 자전거로 오가는 시민들이 더 늘수록 우리 도시는 더 건강해질 것이다.

예쁜 꽃을 연신 피우는 꽃기린에 물을 줄 때도, 목이 말라 축 처진 무늬산호수 줄기가 물을 받아먹고 고개를 들었을 때도 설렌다. 지하철 계단에서 할머니 짐을 들어주는 청년을 볼 때도, 아이를 목말 태우고 성큼성큼 걷는 젊은 아빠를 볼 때도 설렌다. 설렘은 어쩌면 떨림이다. 자연의 신비에 경탄할 때, 살아 있는 것들과 교감할 때 미세하게 울리는 진동 같은 것. 설레게 하는 것들 덕에 이 가을 나는 행복하다.

그런데 마냥 행복하지 않고 한편으론 걱정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절이 더는 오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하다. 코로나19도 결국 기후변화 때문인데, 이상 기후 현상을 일상처럼 겪는 지금 눈앞으로 다가온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어찌 될까. 맑은 하늘도, 선선한 바람도 더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숱한 생명들과 함께 사람들도 공동체도 버텨내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 오래오래 설레고 행복하려면 지켜야 한다. 자연과 생태를. 우리 지구를. 더 늦기 전에.

정석 서울시립대 교수 <천천히 재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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