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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詩想과 세상]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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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어머니는

먼 남쪽으로 밥 지으러 가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식은 아랫목은 다신 데워지지 않았다

식구들끼리 달라붙어

서로 몸 뒤채며

체온을 나눠 가지다가 문득,

달그락달그락 그릇 씻는 소리에

문 열고

마당 내다보니

차고 맑은 우물 속

어린 동생에게 밥 한술 떠먹이고 싶은

고봉밥그릇이 떠 있었다

배영옥(1966~2018)

대처로 돈 벌러 간 아버지를 신작로 옆에 쪼그려 앉아 마냥 기다렸다. 땅에 글씨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저 멀리 뽀얀 먼지를 길게 매단 버스가 나타났다 지나갔다. 땅거미가 지고, 막차에도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혼자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실망한 눈동자가 보였다. 늦은 밤, 읍내부터 걸어온 아버지가 집에 오시면 비로소 명절 분위가 났다.

배영옥 시인의 추석도 기다림으로 시작된다. “먼 남쪽으로 밥 지으러” 간 어머니는 끝내 돌아오시지 않는다.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배고픈 어린 동생들과 까무룩 잠이 든다. “달그락달그락 그릇 씻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고 내다보니 하늘에, 우물에 보름달만 환하게 떠 있다. ‘성묘’라는 시에서 “자박자박/ 맨발로 꿈속까지” 따라왔다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는 끝내 걸어서 집에 돌아오지 못한 모양이다. 다 큰 동생들을 두고 조금 일찍 어머니 곁으로 간 시인, 올 추석은 먼 남쪽에서 어머니와 고봉밥을 먹을 수 있겠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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