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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로마가 불타는데 연극을?”… 객석에 탄식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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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취소 ‘아르코 파트너’ 연극 ‘외설적인’

영상 촬영위해 ‘비공개 공연’올리던 날

조선일보

연극 ‘외설적인’의 막바지, 극작가의 거실 뒤로 비가 내리면, 서로 사랑했던 극 속의 두 여자 ‘망케(박서영)’와 ‘리프켈레(강민지)’가 빗속에서 서로를 안는다. 아름다운 엔딩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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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런 거 저런 거 다 잊고, 그냥 오늘 무대에만 집중하려고요.”

25일 저녁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연극 ‘외설적인(Indecent)’이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올라가니 어떤 마음이시냐 물었더니, 이동선 연출가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오늘에만 집중하겠다”고 했다. 이동선은 올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파트너’로 선정된 예술가 4명 중 유일한 연극 연출가다. 나머지 3명은 모두 무용가. 당연히 ‘아르코 파트너’ 작품 중 연극도 ‘외설적인’ 단 한 편이다. 지난 16일 개막 예정이던 이 연극은 공공극장 셧다운이 길어지며 25~27일 3회 일정으로 축소됐고, 그마저 끝내 다 취소됐었다. 기약없는 개막을 기다리는 스태프와 배우들의 속도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영영 못 올릴 줄 알았는데, 기적처럼 25일부터 세 차례 영상 촬영을 위한 비공개 공연이 잡혔다. 공연계 인사 소수만 참석할 기회를 부여받은 귀한 무대였다.

◇ ‘일정 축소’→‘전면 취소'→‘비공개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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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제작됐던 연극 '외설적인'의 포스터. 16일부터 예정됐던 공연은 취소됐고, 25~27일 단축 공연한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마저 모두 취소됐다. /한국문화에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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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로마가 불타고 있는데, 당신은 연극을 올리길 원해?”

2차 대전의 불길이 겨우 가라앉은 1952년 미국 코네티컷. 일흔 넘은 극작가 남편 ‘숄럼 아시’(최무인)가 말했다. 그는 막 한 예일대생 젊은이가 논란을 일으켰던 자신의 희곡을 무대에 올리겠다며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은 참이다. 평생 함께해온 아내 ‘마제’(홍윤희)가 남편의 냉소를 웃으며 맞받았다. “로마는 항상 불타고 있었으니까요.”

코로나 시대 공연인들의 마음이 담긴 듯한 대사에, 신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낮은 탄성이 객석 사이로 번졌다. 무대 위 배우들은 ‘로마가 불타고 세계가 위기에 처할수록 더 절실히 연극과 예술이 계속돼야 한다’고 웅변하듯 필사적이었고, 600석 극장에 드문드문 앉은 ‘관객’ 30여 명의 갈채는 이심전심으로 더 뜨거웠다.

연극 ‘외설적인’은 폴란드계 유대인 극작가 숄럼 아시(1880~1957)의 연극 ‘복수의 신’에 관한 실화를 한 가상극단과 그 주변 이야기를 통해 풀어나간다. 유대인 사창가와 여자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뤄, 1906년 독일 초연 때부터 공연되는 곳마다 풍파에 휩싸였던 연극이다. 홀로코스트의 재 속에서 되살아나듯 등장한 배우들은 ‘유대인 비하’라며 비난 받은 유럽 시절부터 외설죄로 옥고를 치른 미국 공연까지 다양한 인물이 돼 반세기를 살아간다. 소수민족 언어의 한계, 인종 차별, 사회적 무지,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가의 기개를 꺾고 세상과 타협하려는 자신과 싸운다.

◇대극장 무대 뒤편에 내리는 비…아름다운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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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외설적인'의 엔딩, 극 속의 두 여자는 '로마가 불타고 있을지라도 꿋꿋이 연극을 무대에 올려온' 이들을 대극장 무대 뒤편으로 내리는 빗 속으로 부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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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막바지, 나치 치하 폴란드 게토의 다락방에서 유대인 식별 표지인 노란 별을 가슴에 달고도 연극을 계속하던 배우들이 끝내 쓰러지면 대극장 무대 뒤편으로 쏟아지듯 비가 내리고, 서로 사랑했던 극 속의 두 여자가 그 비 속에 서로를 안는다. “밤이 너무 아름다워. 비가 너무 신선하고 공기는 너무 달콤해. 이제 아무도 너를 아프게 하지 못할 거야.”

2017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돼 그해 토니상을 받은 동명 희곡이 원작. 실화와 픽션을 영리하게 섞고 보드빌 스타일의 노래, 음악, 춤을 더했다. 국립극단 단골 주역 박윤희 배우의 명불허전 명연, 희곡 속 두 여자 ‘망케’와 ‘리프켈레’를 연기한 신인 박서영과 강민지 배우의 순수한 간절함이 빛났다.

하지만 아무리 개성있는 재료로 잘 만든 요리라 해도, 먹기 좋게 잘 차려내는 것 역시 중요한 문제. 묵직하고 다층적인 서사가 마디마다 매듭을 짓지 않은 채 이어지니, 관객 입장에선 리듬감을 잃은 만연체 문장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눈에 띄었다. 배우마다 소화하는 1인 다역의 인물 구분 역시 친절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초연(初演)에 흔히 나타나지만, 공연이 예정대로 진행됐다면 회차를 거듭하며 더 좋아질 수 있었을 부분들이다.

커튼콜이 끝나고 극장에 불이 켜졌다.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오래 극장 앞을 떠나지 못했다. 배우와 스태프들이 한 명 한 명 나오며 기다리던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사람들은 삼삼오오 대학로 골목으로 흩어졌다. 연극 ‘외설적인’이 바깥 세상과 처음 만난 날, 밤이 저물고 있었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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