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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아프면 쉬라고?…연차 쓰려면 ‘가위바위보’ 이겨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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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갑질 119, 직장인 1천명 대상 설문조사

10명 중 4명 “자유롭게 연차휴가 못 쓴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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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에서 근무하는 ㄱ씨는 아파도 쉴 수 없다. 그는 연차휴가를 쓰기 위해 직장 동료와 ‘가위, 바위, 보’를 한다. 회사는 매달 연차 신청을 받지만 신청 가능한 인원을 하루 한명으로 제한하고 있어 동료들의 경쟁이 치열하다. ㄱ씨는 “원하는 날에 연차를 사용하려면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겨야 겨우 쓸 수 있다”며 “경쟁에서 이겨 쉬는 날을 정했어도 회사가 출근하라면 출근해야 하고, 회사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결근으로 처리돼 불이익을 받는다”고 했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선 ‘아프면 집에서 쉰다’는 생활방역 수칙이 중요하지만 직장인 10명 중 4명은 자유롭게 연차휴가를 쓸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27일 공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회사에서 자유롭게 연차휴가를 사용하는지” 묻는 질문에 응답자 1천명 중 39.9%가 “자유롭게 쓸수 없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62%는 아플때 급여를 받고 쉴수 있는 유급병가 제도가 직장에 없다고 했다. 직장갑질 119는 여론조사전문기관에 의뢰해 지난 7~10일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연차휴가를 자유롭게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 소득 150만원 미만 저소득자는 중 52.4%가 “연차휴가를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고 답해 연차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월 소득 500만원 이상 고소득자 비중(20.9%) 보다 2.5배 가까이 많았다. 아울러 서비스직 노동자(48.5%)는 사무직 노동자(32.0%)보다, 노동조합에 소속되지 않은 노동자(45.2%)는 소속된 노동자(19.6%)보다 연차휴가를 사용하기 어렵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비정규직‧저임금 노동자처럼 고용상태가 불안정할수록 아파도 쉬지 못했다. 정규직 노동자 중 직장에 유급휴가 제도가 없다고 답한 비중은 51.7%로 절반을 조금 웃돌았지만 비정규직과 프리랜서‧특수고용 노동자는 각각 77.5%, 85.5%가 직장에 유급휴가 제도가 없다고 했다.

직장갑질 119에는 ‘휴가 갑질’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 감기 몸살로 연차를 냈다가 다른 직원들 앞에서 “덩치도 있는 애가 뭐가 아프냐? 뚱뚱해도 감기에 걸릴 수 있냐? 왜 추위를 타냐”며 외모비하 발언을 듣거나, 집안일 때문에 연차를 쓰려 헀다가 “연차휴가를 쓸 정도로 일이 없냐”며 면박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 8년 동안 결근 한 번 없이 근무하면서 연차휴가를 한번도 쓴적이 없고, 연차휴가 보상 수당도 받은적이 없다는 노동자도 있었다.

한겨레

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장(질병관리청장)이 25일 충북 청주시 질병관리청에서 열린 정례 브리핑에서 이날 오후부터 만 12살 이하와 임신부의 독감 무료접종이 재개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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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은 아파도 마음대로 쉴 수 없는 직장 분위기가 생활방역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다. 설문조사 응답자의 43.6%가 ‘아파도 일해야 하는 직장 분위기가 코로나19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83.9%는 노동자가 아파서 쉴 경우 정부가 소득을 보전해주는 ‘상병수당’ 제도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상병수당 제도가 없는 나라는 미국과 한국뿐이다.

질병관리본부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행동수칙 중 하나로 의심 증상이 있을 경우 등교나 출근을 하지 말고 3∼4일 경과를 관찰하며 집에서 휴식을 취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날 직장갑질119는 “코로나19 예방‧종식을 위해선 모든 노동자들에게 자유롭게 휴식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관련 부처와 국회에 법제도 개선을 요청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에게 전달했다.

아래는 직장갑질이 보낸 편지전문.

박윤경 기자 ygpark@hani.co.kr



안녕하세요. 저는 사단법인 직장갑질119 스탭 조윤희 노무사입니다.

먼저 전 국민을 코로나19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애써주시는 청장님께 국민의 한 사람으로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정례브리핑 뉴스에서 청장님을 뵐 때마다, 힘드실 텐데도 불구하고 항상 흔들림 없이 담담하게 말씀해주셔서 안정감을 느끼고 방역지침을 잘 준수하면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청장님께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것은 정부에서 ‘일터에서의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아프면 집에서 3~4일 쉴 것’을 권고하고 있음에도 이러한 지침에 따라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질병관리본부에서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행동수칙 중 하나로 유증상자의 경우 등교나 출근을 하지 않고 외출을 자제하며, 3~4일 경과를 관찰하며 집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할 것을 제시하였습니다. 고용노동부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연차휴가, 병가 등 휴가 제도를 활용하고 휴가사용을 이유로 불이익을 주지 말 것을 권고했습니다. 사실 연차휴가의 경우 원래 근로기준법에서 보호하는 노동자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청장님, 그런데 실제 직장에서는 휴가사용을 제한하는 강압적 분위기로 위와 같은 지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2020년 7-8월 사이 직장갑질119에는 회사에서 휴가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노동자들의 상담이 많았는데요, “갑자기 몸이 많이 아파서 회사에 병가를 신청했는데, 대표가 직원들에게 왜 출근 안하고 병가를 썼냐고 말하고, 병가 사용 후 복귀하자 아프면 일을 같이 못한다며 퇴사를 강요했다”는 사연부터 “한 직원이 몸살감기로 연차를 냈는데, 사장이 다른 직원들 앞에서 덩치도 있는 애가 뭐가 아프다고 안 나오냐고 인격 모독성 발언을 했다”는 사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했던 콜센터 사업장에서는 “회사가 하루에 연차사용 가능인원을 1명으로 제한하고 있어 원하는 날에 연차를 사용하려면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겨야 겨우 쓸 수 있다. 그렇게 이겨도 회사가 요구하면 나와야 하고 나오지 않으면 패널티를 준다.”는 사연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장갑질119에서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휴가사용 실태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응답자의 39.9%가 연차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고 답변했고, 응답자의 62%가 별도의 유급병가 제도가 없다고 답변하였습니다. 특히 상용직이 아닌 임시직,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프리랜서), 영세한 직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일수록 연차휴가나 유급병가를 보장받지 못하는 비율은 훨씬 높았습니다.

이렇듯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이거나, 영세 사업장에서 근무하거나, 근로계약이 아닌 다른 형태의 계약을 맺고 근무하는 노동자(특수고용노동자/프리랜서)일수록 정부의 방역지침을 통한 보호에서 배제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상용직의 경우 휴가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계약해지 등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고, 5인 미만이 근무하는 영세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근로계약이 아닌 다른 명칭의 계약을 맺고 일하는 노동자는 법적으로 연차휴가가 보장되지도 않습니다.

청장님은 한국과 세계 언론에도 보도되었듯 감염병, 방역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이십니다. 이런 청장님께 감히 의견을 말씀드리면, 사람이 밀집되어 있는 직장에서 아파도 참고 쉼 없이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휴식할 시간과 기회를 부여하는 것” 즉 “모든 노동자들이 연차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정부에서 관리 감독하고, 유급으로 병가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코로나19의 예방과 종식에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됩니다.

한국사회 전체 인구 중 절반 이상은 회사에 노무를 제공하고 그에 따른 급여를 받으며 생계를 유지하고, 이런 노동자들은 퇴근 후 가족을 만나고 지역사회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아플 때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유급휴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방역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덧붙여 질병관리청의 브리핑에서 거의 매년 새로운 감염병이나 재출현하는 감염병이 유행한다는 발표했는데, 그렇다면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코로나19를 계기로 모든 노동자들이 유급휴가, 유급병가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사회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저희 직장갑질 119는 코로나 초기부터 일주일 정도의 유급병가제도 도입과 저임금, 비정규, 특수고용, 중소영세사업자 등 유급병가제도 사용이 어려운 계층에는 건강보험에서 상병수당(상병급여) 제도를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고 요구해왔습니다. 방역 관리 하나만으로도 너무 바쁘시겠지만 정은경 청장님께서도 관련 부처에 제도개선을 요청해 주시고, 국회에도 관련 법의 개정을 요청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직장갑질119는 코로나19로 인해 해고, 무급휴직에 내몰려 생계가 위험에 처한 노동자들, 위와 같이 아파도 휴가사용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청장님을 비롯한 질병관리청에서도 방역 방법의 일환으로 노동자들의 ‘아프면 자유롭게 쉴 수 있는 권리’에 대해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편지를 보내봅니다.

방역의 일선에서 국민 모두의 안정을 위해 일하시는 청장님을 비롯한 질병관리청의 모든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어서 코로나19가 종식되는 날이 와서 정례브리핑에서 마음 편히 활짝 웃으시는 청장님의 모습을 뵙고 싶습니다. 저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방역지침을 잘 지키겠습니다. 건강 잘 챙기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 9. 27

직장갑질119 스탭 조윤희 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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