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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문파 권력] 문자 폭탄에 "양념" 두둔…문파 키운건 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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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 권력④]

중앙일보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존 바이든 부통령과 박빙의 경쟁을 펼쳤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지난 2월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유세에서 연설하고 있다. [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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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지자들에게 원하는 건 이슈에 대해 활발히 토론하는 것이다. 추악한 인신공격은 필요 없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지난 3월 자신의 지지자들을 이렇게 비판했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샌더스 의원은 극성맞은 팬덤으로 유명하다. 당시 그의 지지자들은 경쟁 후보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뱀과 합성한 사진을 유포하는 ‘스테이크 워런(#SnakeWarren)’ 해시태그 공격을 펼쳤다. 미국 MSNBC 방송의 ‘레이철 매도우 쇼’에서 이에 대한 질문을 받은 샌더스 의원은 “완전히 경악스럽고 역겹다”며 “난 그걸 규탄했다(I condemned that)”고 했다.

이는 단순한 면피성 발언이 아니었다. 미국 허핑턴포스트가 입수한 서신에 따르면, 샌더스 의원은 상대를 괴롭히는 방식의 선거운동을 캠프 내부에서 금지했다. 대선 출마 1주일 뒤 100명이 넘는 유세원들에게 일일이 보낸 이메일을 통해서다. 그는 “난 일체의 괴롭힘을 반대한다”며 “예의 바르게 경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고 적었다.

중앙일보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는 23일 서울 양천구 예술인센터에서 열린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강성 지지자에 대해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에너지원"이라고 했다. 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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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한국 정치 지도자들의 모습과 다르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23일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강성 지지자에 대한 의견을 묻는 말에 “강성 지지자라고 해서 특별한 분들이 아니라 상식적인 분이라고 볼 수 있다”며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에너지원”이라고 호평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7년 3월 대선 경선 승리 직후 문파(文派)의 문자 폭탄과 비방 댓글에 대해 “우리 경쟁을 더 이렇게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두둔했다.

문파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2020년 한국 사회의 중요한 정치·사회적 현상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다른 나라에도 유사한 사례는 많지만, 유독 진영 대립이 강하게 나타나는 최근 모습이 우려스럽다는 의견이 많았다. 민주당은 물론 국민의힘도 강성 팬덤에 휘둘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상훈 사단법인 정치발전소 학교장(정치학 박사)과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등 진보 지식인 4명에게 문파 현상의 원인과 특징, 해법을 물었다.



박상훈 “與 다원주의 축소, 한국 정치사상 처음”



정당 정치 전문가인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문파 현상에 대해 “문파는 이견 자체를 억압한다”면서 “정당 다원주의와 당내 다원주의를 동시에 약화시키기 때문에 문제”라고 했다. 그는 “집권당이 그야말로 한 가지 목소리로 일색이 됐고, 그 특징은 대통령의 자유를 위해서 다른 목소리를 희생하거나 억압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라며 “한국 정치 역사에 이런 현상은 지금이 처음”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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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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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학교장은 “과거 ‘3김 시대’ 보수주의 구조보다 다원주의를 더 제약하는 정당이 등장했다”는 분석도 내놨다. ‘3김 시대’에는 최소한 YS계·DJ계 등 파벌 싸움을 통해 다원주의가 실현됐지만, 지금은 대통령과의 친소 관계에 따라 ‘진문’, ‘친문’, ‘핵심 친문’ 등의 파벌이 정해지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책임정치가 약화되는 점도 문제점으로 거론했다. 그는 “과거 노사모만 해도 전국 노사모 대표가 있지만, 문파는 대표가 없다”며 “대표가 없으면 이들이 발휘하는 영향력을 책임질 수 있는 고리가 형성되지 않는다. 결과가 긍정적이지 않을 때 견제하거나 자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의 문파와 같은 구조에선 소수의 동원력만 가지면 정치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안병진 “정치인의 자질과 정당구조가 문제”



미국 정치 전문가인 안병진 경희대 교수는 정치가의 자질을 문파 현상의 한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미국은 당이 중심을 잡고, 또 샌더스 의원을 포함한 정치가들이 건국자들의 정신(founder’s mentality)을 유지하면서 지지자들의 과도한 경향에 단호하게 선을 그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정치에 대해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모진 탄압에도 그걸 용서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대연정까지 고민하던 정신이 있었다”며 “지금은 그런 정신과 상당히 멀리 떨어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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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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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안 교수는 문파나 현재 민주당 정치인에 일방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문파 현상의 이면에는 노 전 대통령의 안타까운 죽음과 이에 따른 분노와 공포가 있다. 민주당 정치인들도 권리당원의 지나친 권한 때문에 이에 편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이해한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해법으로 정치인의 책임성과 당 제도 혁신을 주문했다. 그는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책임 윤리 차원에서 되돌아봐야 하고, 또 동시에 그런 정치인이 많아지려면 권리당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당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민들이 정당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피한 흐름이지만, 그 과정에서도 권리당원 비율을 지나치게 많이 두거나 심의·숙고 절차를 두지 않은 게 결정적인 문제”라며 “현재 정당구조는 비정상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원재 “팟캐스트·유튜브 통한 높은 체감도가 특징”



빅데이터 전문가인 이원재 카이스트 교수는 “과거에도 여러 정치 팬덤 현상이 있었지만, 오늘날은 기술의 발달로 그 어느 때보다 즉각적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결집한다”며 팟캐스트와 유튜브 등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한 높은 체감도를 문파 현상의 특징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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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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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교수에 따르면 이같은 지지층의 결집이 항상 일어나는 건 아니라고 한다. “정치 세력 상층부와 팬덤 사이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야 결집 현상이 강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2018년 경기지사 예비후보 경선에서 이재명 지사와 전해철 의원이 경쟁했을 때는 강성 지지층이 분화됐지만, 지난해 조국 사태와 총선에선 지지층의 이해가 일치하면서 상대적으로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 엘리트들 내부의 분화·갈등이 심해지면 이런 팬덤도 환상에서 깨어나는(disillusionment) 단계를 거칠 수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팟캐스트와 유튜브의 역할에도 주목했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정파성을 띤 온라인 미디어가 이런 결집을 강화하고, 일부 정치인들이 이런 방송에 출연하면서 당의 진로를 좌지우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태극기 세력과 일부 유튜브 방송이 결합해 당 조직 전체를 극단적으로 몰고 간 게 미래통합당의 실패 원인 중 하나였다”며 “민주당과 문파가 이런 경향성으로부터 자유로운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신진욱 “소수 인플루언서가 과잉 대표하는 경향”



정치사회학·사회운동을 연구해 온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는 말까지 나오는 극단적인 진영 대결이 벌어지고는 있지만, 전체 시민들 가운데 극단적인 지지층·반대층은 일부”라고 말했다. 극단적인 논란이 벌어질 때도 중도 보수와 중도 진보까지 합친 중도층이 50% 이상 안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게 근거다. 신 교수는 “매우 공격적인 정치 활동을 일상적으로 하는 분들은 가시성이 두드러진다”며 “이들이 전체 판도를 과잉대표 하는 양상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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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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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교수는 또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극소수 인플루언서(influencer·온라인유명인)가 절대다수의 댓글과 ‘좋아요’를 독점하는 것으로 여러 연구 결과에서 나타난다”라고도 했다. “온라인 공론장은 얼핏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며, 그 결과 선정적이고 극단적이며 정보력이 있는 소수가 여론을 주도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신 교수는 정당 정치의 참여 확대가 절대 선이라는 항간의 인식에도 이견을 나타냈다. “시민들의 정치의식 성숙이 동반되지 않은 채 선명성 경쟁이나 순혈주의에 갇히면,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 역시 대안으로 정당 구조 개혁을 꼽았다. 그는 “정당 내부에서도 다원적인 권력 분산이 필요하고, 숙의 구조를 다층적으로 만들어야 다양한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오현석·정진우 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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