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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추석 앞둔 청량리 시장…갑작스런 화마에 “일년 장사 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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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목 앞두고 물량 늘렸는데 막막해”

현장에는 청과물 종이상자 나뒹굴어

분노하거나 망연자실한 상인들

인명피해는 없으나

납품용 청과물 등 재산피해 클 것으로 예상


한겨레

21일 새벽 불이 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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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1일 새벽 화재가 발생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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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장사가 잘 안됐어요. 그러다 맞는 첫 대목이니까 거래처 전화도 많이 오고, 그래서 마음이 들떠서 물량을 많이 주문해뒀는데….”

서울 제기동 청량리 청과물시장에서 30년 넘게 닭과 오리를 팔아온 중년 부부는 경찰이 설치한 노란색 폴리스라인 앞에서 떠날 줄 몰랐다. 부부는 21일 새벽 4시40분께 시장 상인회로부터 화재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가게 앞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가게 안에는 추석 대목을 겨냥해 떼어 온 4천만원어치의 고기가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부부가 도착했을 땐 이미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고 가게 지붕에선 불길이 올라오고 있었다. 부인은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린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남편은 옆에서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평소보다 3~4배 물량을 늘렸는데 다 타버렸으면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당장 거래처에다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모처럼 추석 대목에 대한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던 상인들은 검은 재로 뒤덮인 삶의 터전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들의 출입을 막는 폴리스라인 너머로 타다 만 사과와 감 등이 보였다.

소방당국은 이날 새벽 4시32분께 화재 신고를 접수한 뒤 현장에 출동해 11시53분께 불을 진화했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인명피해는 없으나 청과물 점포를 비롯해 20여개 점포가 불에 탔고, 이 가운데 7곳은 전소돼 재산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이날 타버린 창고의 소유주 윤태인(66)씨는 청량리에서 40여년 동안 청과물을 팔았다. 윤씨는 <한겨레>에 “새벽에 전화를 받고 나왔더니 이미 불에 다 타버렸다. 불난 240평짜리 창고 안에 추석용 호두, 밤, 과일 등만 10억원어치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윤씨 옆에는 물에 젖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상자들이 나뒹굴었다.

상인들을 상대로 2년 동안 장사를 해온 백반집 주인 이아무개씨는 “밤 열두시 반쯤 출근했는데 새벽 4시10분부터 불 냄새가 났다. 몇몇 사람들과 불을 꺼보려고 했는데 천장으로 넘어와 진화하질 못했다. 안타깝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화재가 발생한 청과물 가게에서 일하는 60대 여성은 굴착기가 폐기물을 치우는 현장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다시 여기서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시장 경비원들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건물 잔해와 물건 등을 말없이 빗자루로 쓸어냈다.

운 좋게 화재 피해를 입지 않은 상인들은 장사를 계속하면서도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화재 현장 건너편 골목에서 청과물 가게를 30년 동안 운영해온 박아무개(65)씨는 “피해자들은 일년 장사를 다 망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씨는 “과일은 냄새 배면 다 버려서 못 파는데 그 과일을 누가 보상해주겠나”라며 “화재 원인 감식한다고 한두달은 장사 못 하고, 그다음엔 시장 수리한다고 제대로 가게를 열지 못할 거다. 추석 대목을 맞아 사정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나 했는데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재도 청량리청과물시장상인회 운영위원장은 “타버린 물건 대부분이 추석 납품용이라 상인들이 더욱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장 보러 나온 시민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시민들은 “상인들이 코로나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들 텐데 이런 일까지 당하나”라며 안타까워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22일부터 화재 원인 조사를 위해 합동감식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서울시도 재발방지대책과 피해보전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상인들의 망연자실한 표정은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글·사진 배지현 기자 bee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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