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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젠더’ 용어 첫 사용한 진보·페미니즘의 아이콘 긴즈버그 美 대법관, 87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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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18년 11월 워싱턴 대법원에서 촬영한 루스 배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모습. 진보의 아이콘으로 여겨진 그는 18일(현지 시각) 87세의 일기로 별세했다./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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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법원에 입성한 두번째 여성 대법관이자 ‘진보의 대모’,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루스 배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18일(현지 시각) 워싱턴 자택에서 87세로 별세했다고 뉴욕타임스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유족에 따르면 그는 췌장암과 폐암을 오래 앓아왔고 이로 인한 합병증으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우리나라가 정의라 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을 잃었다”며 “오늘 우리는 슬퍼하지만 지칠 줄 모르고 단호했던 정의의 옹호자 루스 배이더 긴즈버그를 미래 세대가 기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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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대법관 취임 당시 긴즈버그의 모습. 자신을 임명한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촬영했다./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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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cm 남짓한 키에 몸무게도 겨우 45kg밖에 안되는 긴즈버그는 미국 진보의 아이콘, 페미니즘의 선구자로 불릴만큼 파격적인 판결을 여럿 내린 인물이다. 1933년생으로 뉴욕 브루클린에서 나고 자란 그는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다. 그가 입학할 당시 하버드 로스쿨 여학생은 2% 뿐이었다. 교직원들로부터 “남자들이 앉을 자리를 빼앗았다”는 비난을 들었고 “여성은 도서관 열람실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경비원에 막혀 도서관 이용도 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콜롬비아 로스쿨로 옮겨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이후에도 똑똑한 여성을 향한 성차별은 계속됐다. “여성과 함께 일할 수 없다”는 이유로 로펌 입사는 번번이 좌절됐다. 1963년 럿거스 로스쿨에서 교수로서 첫 커리어를 시작한 긴즈버그는 “고액 연봉자인 남편이 있으니 당신의 연봉은 다른 남성 교수들보다 적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미국 로스쿨 교수 중 여성은 20명이 채 안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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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긴즈버그 대법관이 대법원에서 만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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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부턴 변호사로 활동했다. 긴즈버그는 미국 최초의 법률저널인 ‘여성 인권 저널’을 공동창립했다. 이후 미국 시민 자유 연합(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의 여성 권리 프로젝트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2년동안 300건이 넘는 성차별 사건을 맡았다. 성차별이 여성 뿐만 아니라 남녀 모두에게 해롭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치밀한 전략을 세워 재판에서 승소했다. 표면적으로 여성에게 유익한 것으로 보이는 법률도 실제로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해야하는 상황을 만든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sex(성)’라는 말을 사용하면 남성 판사들이 산만해질 것이라며 대신 ‘gender(젠더)’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대법원까지 올라간 6번의 재판에서 5번 승리하면서 법의 다양한 분야에서 성차별을 없애는데 공헌했다. 150년간 남자 생도만 받은 버지니아군사학교에 여성의 입학을 허가하도록 요청해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고, 편모에게 지급되는 양육수당을 편부에도 지급하라며 남성의 권리를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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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현지 시각) 루스 배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 대법원 앞에 모여들었다./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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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콜롬비아 법원에서 판사 일을 시작했고, 60세가 되던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추천으로 대법관에 임명됐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 다음으로 미국 역사상 두번째 여성 연방 대법관이자 첫 여성 유대인 대법관이 탄생한 것이다. 2006년 오코너 대법관이 은퇴한 뒤 대법원 내 유일한 여성 대법관이 됐다.

대법원에서도 긴즈버그는 시대의 가장 논쟁적인 사회 문제에 대해 27년간 꾸준히 진보적인 표를 던져왔다. 특히 여성낙태권, 동성결혼 등 미국 사회의 불평등에 있어서 약자에 힘을 보태며 젊은 세대의 지지를 한몸에 받아왔다. 2013년엔 흑인 투표권자들에 대한 차별이 사라졌다며 투표권법 핵심 조항을 대법원이 삭제했는데, “투표 과정의 인종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오늘의 판결은 폭풍이 몰아치는데도 우리는 젖지 않을 것이라며 우산을 내던진 꼴”이라며 신랄한 반대 의견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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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현지 시각) 루스 배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별세에 애도하는 사람들이 미국 뉴욕에 있는 그의 얼굴이 그려진 액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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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엔 동성결혼식에서 주례를 맡았고, 2015년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국내 1호 동성 부부 등 성소수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덕분에 긴즈버그는 반대파들로부터 ‘마녀’ ‘악랄한 운동가’ ‘대법원의 수치’라는 비난섞인 별명도 얻었다.

87세 할머니이지만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스타로 여겨진다. 긴즈버그의 얼굴 캐릭터가 새겨진 티셔츠, 가방, 타투까지 불티나게 팔리고 있고, 2018년 낙상해 갈비뼈 3대가 부러졌을 때는 트위터에 ‘내 갈비뼈를 가져가라’ ‘내 수명의 몇 년을 떼 주겠다’는 트위터가 수십만 공감을 받을 정도다.

지난해엔 그의 일기를 다룬 영화 ‘루스 배이더 긴즈버그:나는 반대한다(RBG)’가 제작됐는데, 영화 속 그는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 목을 밟은 발을 치워달라는 것 뿐”이라고 말해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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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미국 대법원에서 촬영한 대법관들.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유일한 여성 대법관인 긴즈버그 대법관이 서 있다./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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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별세한 뒤 미국 민주 진영에는 큰 고민이 생겼다. 긴즈버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후에는 5대4로 보수적인 인물이 더 많은 대법원 내에서 최소한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져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긴즈버그의 자리에 훨씬 보수적인 인물을 앉힐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를 염려했는지 긴즈버그는 사망하기 며칠 전 손녀 클라라 스페라에게 “내 가장 열렬한 소원은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 될 때까지 내가 교체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그녀의 후임자가 오는 11월 선거를 통해 뽑히는 차기 대통령에 의해 결정됐으면 한다는 뜻을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김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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