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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수상 교체극'에 말려들지 않아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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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정 민교협 사무처장,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
지난 9월 16일 오후 일본 임시국회에서 총리지명선거가 실시되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자민당 총재가 제99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7년 8개월, 그 이전의 1기 내각까지 합치면 8년 8개월에 이른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초장기 집권을 끝내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는 아베 총리가 사임을 표명한 8월 28일 이후 20일 동안, 줄곧 스가 우위의 김빠진 내용으로 전개된 총리교체극이 막을 내린 순간이기도 했다.

그 동안 일본 국내외의 관심은, 한국을 포함하여, 사임의 이유가 된 아베의 건강과 자민당 총재선, 그리고 초반부터 우위를 치고 나간 스가라는 인물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 사이에 아베는 교묘히 그의 정치적 책임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8월 28일의 사임과 그 이후의 ‘정치일정’ 전개에만 과하게 관심을 쏟는 것은, 아베와 그 주변의 책임모면 시도에 말려드는 일이 된다. 그리고 아베의 퇴진을 이끌어낸 일본 시민들의 지난한 싸움을 소거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간의 수상교체극에서 그들의 존재를 더하고 빼는 것의 차이는 일본 인식에서 결정적 차이를 초래하게 된다. 역사는 한 사람의 건강 문제 따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베의 '수상 교체극'에 말려들지 않기

우선 주목할 것은, 아베 내각 지지율이다. 그가 줄곧 양호한 지지율을 보이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사임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NHK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베 내각을 지지하는 사람은 작년 8월에 49%로 고점을 찍은 뒤, 지난 8월에는 34%가 될 때까지 줄곧 하락세에 있었다. 그나마 지난 2월까지는 완만한 하락세였으나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위세를 보이기 시작한 3월 이후 급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NHK 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지난 1년 동안 아베의 지지율은 계속적인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코로나19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3월에서 4월 사이에 지지율과 반대율이 역전되어 반대 여론이 지지 여론보다 많은 상태에서 계속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베의 지지율이 계속 하강하던 기간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조치 이후의 시기와 겹친다. 그리고 아베의 지지율과 반대율이 역전되는 시기는 한국과 일본의 코로나19 대응이 극적으로 대비되기 시작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작년 7월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조치는 10월의 소비세 인상으로 가계 경제가 압박을 받을 것이 예상되는 가운데 실시되었다. 일본 정부는 올해 들어 도쿄 올림픽 패럴림픽을 계기로 한 관광특수가 예상되었기에 아베노믹스의 효과를 지속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수출규제조치를 취하면서 수상관저에서는 일본 경제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우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낙관적인 기대 속에서 일본은 수출규제조치를 강행했다. 수출규제조치는 한국 시민사회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조직화된 아베 보이콧 운동이 일본 지방경제에 큰 타격을 가했다.

대표적인 곳이 한국인이 많이 찾던 규슈의 유후인온천이다. 여행객의 증감은 온천여관만이 아니라, 요식업 자영업자들, 여관과 요식업 종업원들, 온천여관과 레스토랑 등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농가와 어촌, 여관과 호텔 등의 시설 관리, 증축, 개축 등에 종사하는 업자들, 택시와 버스, 철도 등의 교통 관련 업체들, 지역의 기념품 상가 등 지역 경제에 종합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본정부가 Visit Japan을 구호로 본격적인 관광입국 정책을 펴기 시작한 2003년 유후인을 방문한 외국인은 전체의 1% 미만이었다. 그것이 작년 현재 70%에 이르러, 일본인의 두 배 이상을 외국인 관광객이 차지하게 되었고, 그 외국인의 다시 70%을 한국인인 차지하게 되었다. 유후인 경제의 50%를 한국인이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증가 일로인 최대 고객 한국인 관광객이 작년 7월 이후 줄기 시작해서 두달만에 5분의 1로 격감했다. 유후인과 같이 한국인이 많이 찾던 일본 전국의 관광지들이 타격을 받았다. 기대했던 올림픽 특수는 코로나19로 무산되었고, 코로나 팬데믹의 장기화로 이들 관광지에서는 폐업이 속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조용히 ‘노 아베’ 여론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베의 지지기반인 야마구치현 현청에서는 아베 수상의 연속 재임기록 경신 축하 현수막에 대해 비판 전화와 메일이 쇄도했다. 작년 11월, 통산 재임기록 최장기록 달성 때에도 축하 현수막을 내걸었는데 그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일본의 수출규제조치에 한국 시민사회가 저항하면서, 한국에 진출한 많은 일본 기업들도 손해를 봤다. 피해가 컸던 대표적 기업 유니클로의 야나이 다다시(柳井正) 사장은 한국인의 감정을 이해한다며, 이 무렵부터 일본 비판, 아베 비판의 목소리를 주저 없이 내기 시작했다. 일본 제일의 자산가로 그의 발언은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다. 그런 그가 일본 우익의 공격 속에서도 여전히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아베의 코로나 대응 실패에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었다.

우익의 공격을 무릅쓰고 아베의 권력 사유화와 헌법개정 시도에 철저하게 반대하며 용감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다. 시라이 사토시(白井聡) 교수는 아베 퇴진만으로는 불충분하다며, 일본 국민의 과제는 그가 마땅히 가야할 곳, 즉 감옥에 그를 보내는 것이라고까지 썼다. ‘75년 전의 실패를 우리 손으로 청산해야 한다’는 제목의 이 칼럼은 지난 2월 말, 아직 코로나가 심각해지기 전, 즉 아직 아베의 실정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기 전인 상황에서 ‘일간 겐다이(현대)’라는 인터넷 매체를 통해 발표되었다.

서울에 나와 있는 일본 신문 방송사의 특파원들 가운데서도 한국의 민주주의에 경의를 표하며, 한국의 정치상황과 한일관계를 객관적으로 전하려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다. 듣기로는 본사 데스크에서 취급해 주지 않은 기사들도 있었다고 하지만, 위안부 문제나 강제동원 문제 등에 대한 한국의 입장, 수출규제조치 이후 한국 사회의 반발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려는 노력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은 일본에서 우익들의 댓글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혐한류의 서적과 기사들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객관적 보도에 목말라하는 일본의 독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에 부응하는 것이 기자의 사명이라 믿고 있었다.

이미 아베 내각은 모리토모 학원에 대한 국유지 헐값 매각, 가케 학원에 대한 수의학과 특혜 인가, 공문서 개찬, 벚꽃감상회 문제와 명단의 자의적 처분 등의 스캔들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 검찰청법 개정안 채택을 강행하려는 시도가 아베 반대 여론에 불을 붙였다. 지난 1월, 친 정권 성향의 구로가와 히로무(黒川弘務) 도쿄고검 검사장의 정년을 각의결정으로 6개월 연장한 것이 발단이었다. 구로가와 검사장은 2월에 정년퇴임이 예정되었지만, 정년이 연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덕에 7월에 임기만료로 교체 예정인 검찰총장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검찰총장 경험자 등 검찰 OB 모임은 검찰청법 개정에 반대하는 의견서에서, 이를 강행하려는 아베 수상에 대해 “프랑스에서 절대왕정을 확립하고 군림한 루이 14세가 ‘짐이 국가’라고 했던 것 같은 중세의 망령을 방불케 한다”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이 문제를 계기로 정치 문제에 대해 발언하지 않기로 유명한 일본의 연예인들이 반대 주장을 트위터를 통해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정작 구로가와 검사장이 도박으로 실각하는 불상사가 발생하면서 개정안 채택을 포기하게 되었지만, 법안에 60% 이상이 반대하는 여론이 부담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사건 직후 6월에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는 아베의 자민당 총재 4선에 반대하는 여론이 70%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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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앞쪽 가운데)가 16일 오후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규덴(宮殿)에서 나루히토(德仁) 일왕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뒤 다른 각료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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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총리 교체극' 뒤, 일본을 진짜로 움직인 사람들이 있다

여론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베 지지의 여론이 조직적인 우익운동의 성과였던 것처럼 아베 반대의 여론도 운동의 성과다. 해석개헌을 통해, 일본이 집단적자위권을 보유한다고 선언하고 이를 위한 법제 마련의 의미를 지니는 2015년의 안보관련 법의 제정 개정에 반대하는 운동이 아베 정권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본의 평화운동은 소련이나 중국에 대한 태도, 특히 그들이 실시했던 원폭실험 등에 대한 입장 차이 등으로 분열했고, 1960년대 이후에는 공산당과 사회당 등 기성좌익에 반발하는 신좌익 운동이 나타나면서 다시 분열했다.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 과정에서는 운동권 밖에 ‘보통 시민의 운동’이 합류하면서 운동의 중심은 더욱 분화되었다. 이후 기성좌익 안에서의 분열에 더해 신좌익 안에서도 첨예한 노선대립 등을 겪으면서 일본의 평화운동은 매우 복잡한 전개양상을 보여 왔다. 소련의 해체와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일본의 평화운동은 크게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같은 시기에 개시된 일본의 보통국가화와 이를 위한 헌법개정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조직하는 원류의 역할을 하여, 고비마다 이를 저지해 왔다.

잠잠하던 이들이 굉음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 3.11 이후의 반원전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는 당시 민주당 정권에 타격을 가했고, 아베의 등장을 도왔을 뿐이었다. 아베는 2012년 재집권 이후 역사수정주의로 이들을 무력화하면서 헌법 해석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 보유를 선언하고, 안보법제를 통과시켜 그 행사를 위한 제도를 마련했다. 그러나 2015년의 안보법제 반대운동으로 평화운동은 재조직화되었다. 2015년 2월에 조직된 ‘전쟁을 저지하고, (헌법) 9조 개정에 반대한다! 총궐기행동 실행위원회’가 모태가 되었다.

그 동안 헌법기념일인 5월 3일의 집회는 공산당 계열의 ‘평화포럼’이 개최하는 집회와, 초당파 시민과 노조가 개최하는 집회가 따로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베 정권의 헌법 무시와 파괴의 폭주’가 가속화되는 정세에 마주해서 이에 대항할 전열의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위의 실행위원회는 이러한 정세에 대응해서 조직되었다. 그해 5월 3일의 집회는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 공원에서 3만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고, 그 열기는 그해 여름 내내 일본을 뜨겁게 달구었다.

아베는 일본 국민의 관심을 아베노믹스로 돌리는 데 성공했고, 스캔들 등으로 지지율이 하락해서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북한으로부터의 안보 위협을 구실로 하고 대중적인 혐한 감정에 편승하여 연명해 왔다. 그것이 장기집권의 요인이었다. 그러나 아베는 결국 그의 염원이던 헌법개정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고,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반대는 이후로도 지속되었다. 총궐기행동 홈페이지(http://sogakari.com)에는 그 동안 전개해 온 운동들이 아카이브에 쌓여 있다. 안보법제가 일본 국회에서 강행 채택된 2015년 9월 19일을 기억하기 위해 시작된 ‘매월 19일 행동’이 ‘평화를 포기하지 않는다’를 구호로, 2015년 10월 이후 매달 국회 주변 어딘가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에 더해 평화문제를 주제로 열린 수많은 집회와 학습회, 강연, 서명회 등의 알림과 보고가 홈페이지에 빼곡히 쌓여 있다. 일본 시민들의 이러한 집념이 결국 ‘보디블로’가 되어 아베의 체력을 고갈시켰다.

일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연대위원회(일본AALA)도 그런 조직의 하나다. 1955년 반둥대회를 계기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전국 규모의 조직으로 2015년 5월에는 도쿄에서 반동대회 60주년 기념 전국대회를 개최했다. 여기에 강연자로 초청받아 방문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하네다에 내리니, 활동가 한 분이 나와서 맞이해 주셨다. 숙소로 가면서 그에게 들은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는 나를 맞이하러 나온 출장에 사무국으로부터 왕복 전철비를 받았을 뿐이라고 했다. 나머지 모든 활동은 자비로 충당한다고 했다. 도쿄 아오야마의 유엔대학에 마련된 강연장에는 일본 전국의 회원들로 가득 메워졌다. 회비는 8,000엔이었다. 적지 않은 액수다. 점심시간에는 삼삼오오 모여서 주최즉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음날에는 시내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남루한 건물에 자리 잡은 작은 사무실에 포스터와 팸플릿과 홍보책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후로도 일본AALA와는 연락을 주고받으며,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AALA의 지방 조직에서 간혹 연락이 온다. 서울 방문단을 조직하고 있으니, 강연을 부탁하고 싶다는 요청이다. 때로 서대문형무소나 나눔의 집,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를 방문하고 싶으니 안내를 부탁하고 싶다는 요청도 온다. 20명 안팎의 작은 방문단인데, 두어 번의 경험을 통해 이들의 진지하고 소박한 모습에 늘 감동을 받는다. 강연은 숙소 주변의 작은 식당에서 이루어진다. 저녁 식사 전에 동아시아 평화와 한일관계 등을 주제로 한 시간 정도 강연을 하고 질의를 받는다. 식사는 갈비를 한 판 굽고, 소주로 건배를 하고, 비빔밥이나 냉면을 한 그릇 먹는 것이 전부다. 헤어질 때 강연비를 주는데, 도저히 받을 수가 없다. 그 돈으로 다음날 저녁이라도 조금 더 풍족하게 드시라고 ‘기부’하고 나오곤 한다.

필자는 2000년대 초반 센다이에 있는 도호쿠대학에 재직하면서, 한국의 주체적 ‘모던(근대)’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고민하던 시인 김기림이 1930년대 이 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대표시 ‘바다와 나비’가 나약한 지식인의 좌절로 폄하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차, 한국 외교부의 지원을 받아 그의 기념비를 도호쿠대학에 세울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센다이에 재직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아오야기 유코(青柳優子), 아오야기 준이치(青柳純一) 부부와 함께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두 분은 센다이를 거점으로 한일시민의 평화교류를 조직하고 실천해 온 분이다. 두 분은 센다이에서 시민들을 재조직해서 시인김기림기념비 건립위원회를 만들어 협력해 주셨다.

그 과정에서 아오야기 준이치 씨와는 서울에서도 몇 차례 만났다. 늘 자비 출장이다. 숙소는 종로 뒷거리의 허름한 모텔이다. 그와 교류하면서 그의 노력을 알게 된 이후, 일본 시민단체와의 교류 행사 때에는 조금이라도 자비를 들여 일본 측의 부담을 줄여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도 또한 아베 퇴진을 이끌어낸 이름 없는 주역이다. 작년 11월 30일에는 김기림 기념비 건립 1주년 모임이 센다이에서 열렸다. ‘센다이에서 일한관계를 심화시키는 시민 모임’, ‘미야기 헌법9조회(宮城憲法9条の会)’, ‘역사를 수용하여 일한의 미래를 만드는 시민 모임’ 등이 기획 준비한 모임이다.

김기림 기념비 건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참고 사례로 삼기 위해 교토 우지(宇治)시를 방문한 적이 있다. 윤동주 기념비를 건립한 시민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발걸음을 우지시로 향하게 했다. 2018년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역에서 내리자 곤타니 노부코(紺谷延子)씨 부부가 맞이해 주었다. 뜨거운 햇빛을 가려줄 밀집모자를 준비해 주셨다. 건립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들에 대해 듣고, 점심까지 얻어먹고 돌아왔다. 기념비 건립과 기념사업은 모두 순전히 회원들의 회비와 손발로만 운영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지자체나 정부의 도움을 받으면 어딘가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후 곤타니씨와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작년 가을에는 윤동주 기념비 건립 2주년 기념식에 초청 받아서 갈 수 있었다. 숙박은 어찌 해 보겠는데 도저히 항공비는 감당이 안된다는 솔직한 고백에, 기꺼이 항공비는 자비로 가겠다고 했다. 우지시 시즈(志津)강변의 기념비 앞에서 기념식을 하고,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에서 강연을 했다. 교토와 우지의 지역 신문들이 관심을 갖고 취재하고 있었다. 강연 후에는 시민들이 만든 일본식 주먹밥과 한국식 김밥 등으로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뭉클했다. 이런 모습들이 한국에 알려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들은 그런 데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러려면 돈이 들고, 돈이 들면 이 일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호주머니 돈으로 이런 행사를 이끌어가고 있는 이들이 아베 퇴진을 이끌어 냈다. 아베가 퇴진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보면서, 그 배경에 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들은 스가 선출로 아베 시즌 2 내각을 출범시킨 그 간의 수상교체극을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었을까? 그런데 그들은 실의에 빠져 주저앉아 있지 않았다. 위의 총궐기행동은 스가 내각이 탄생하던 날 의원회관 앞에서, 아베 아류 내각을 용서하지 않겠다며, 적기지공격능력 보유론에 대한 반대운동을 조직하고 있었다. 일본에 암반과도 같은 개헌 반대 평화주의 세력이 존재한다.

[남기정 민교협 사무처장,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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