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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명동성당, 노숙인 밥집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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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근 노숙인 늘자

수·금·일 오전 11시부터

하루 200명에게 무료 급식


한겨레

명동밥집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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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화려한 야경을 자랑하는 명동, 그 가운데 우뚝 선 가톨릭 성지인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 명동성당과 주교관이 있는 곳에 노숙인 무료급식소가 들어선다면? 누군가는 고결한 성지가 더러워질 수 있다며 불경하게 여기고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레 미제라블>은 소설과 영화, 뮤지컬을 통해 끊임없이 그런 불경한 시도를 속삭여왔다.

너무도 배가 고파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15년형을 살다 가석방된 장발장은 잘 곳도 먹을 것도 없는 노숙인이었다. 미리엘 주교는 주교관에서 살지만 가난을 실천하며 노숙인과 다름없이 먹고 입고 작은 텃밭을 가꾸고 은쟁반 은촛대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유일한 사치로 삼아 살아간다. 장발장에게 먹을 것을 주었지만 은쟁반을 품쳐 달아났다가 잡힌 그의 죄를 용서해줘 새사람이 되게한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을 초대했을 때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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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와 장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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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의 문은 들어오는 사람에게 이름을 묻지 않고 그에게 고통이 있는가 없는가를 물을 뿐이오. 당신은 고통받고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므로 잘 오셨소. 당신이 이름을 말하기 전에 당신에게는 내가 알던 이름 하나가 있소. 당신 이름은 나의 형제요.”

지금까지 주교좌성당이나 주교관은 감히 장발장 같은 노숙인이 넘기엔 벽이 높은 성채였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이 등장하면서 ‘가장 높은 성채’인 바티칸부터 변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11월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미사에서 “크리스천으로서 단 한 사람이라도 가난한 이를 친구로 두고 있는지 자문해보라”고 말한 뒤 교황청에서 노숙자와 실직자 등 1500여명과 오찬을 함께 했다. 이어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 옆 19세기 궁전을 노숙자 쉼터로 만들어 개방했다.

서울대교구도 노숙인을 위해 성채의 벽을 낮춘다. 코로나 확산 이후 명동과 종로, 을지로 일대에 노숙인이 부쩍 늘어나자 노숙인 밥집을 긴급히 열기로 결정한 것이다. 가톨릭에선 단중독사목위원회가 서울역에서, 꽃동네 사랑의집이 종로3가에서, 까리따스수녀회가 방배동에서, 안나의집이 성남에서 노숙인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고 있지만, 주교좌성당에 노숙인을 위한 밥집을 연 것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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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황청으로 노숙자들을 초청해 오찬을 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 <연합뉴스>


명동성당에 문을 여는 명동밥집의 운영 주체는 한마음한몸운동본부다. 서울대교구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인 11월15일 ‘명동밥집’ 축복식을 열고, 내년 1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노숙인 급식을 시작할 계획이다. 매주 수·금·일요일 오전 11시~오후 4시30분에 동시에 50여명씩, 하루 약 200명에게 무료 급식을 할 예정이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운영이 안정되면 주 5일로 배식 일수를 늘리고, 여러 기관과 연계해 긴급 의료·물품 지원, 목욕 및 이·미용 서비스, 심리상담 등도 진행해 이용자의 자활을 도울 예정이다. 명동밥집 운영은 봉사자들의 봉사와 후원을 통한 물품으로 충당한다. 봉사자는 10월 말까지 모집하는데 이미 160여명이 지원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14일부터 매주 월요일에 종로, 서울시청, 을지로, 남대문 일대 노숙인들에게 간식을 전달하며 명동밥집 개소를 알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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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무료급식소 경기도 성남 안나의집에서 가톨릭 봉사자들이 노숙인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다. 사진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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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밥집은 명동성당 안쪽 옛 계성여중고 1층 샛별관에 마련된다. 노숙인들이 성당의 앞마당을 통해 명동밥집을 드나들게 되면서 명동성당은 자연스럽게 노숙인과 공간을 공유하게 되는 셈이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장 김정환 신부는 “교인들이 노숙인이 명동성당에 오는 것을 싫어할 수 있겠지만, 그런 교회와 교인의 모습은 바뀌어야 한다”며 “명동밥집이 빈자를 대하는 일반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신부는 ‘교회는 상처받은 사람을 위로하는 야전병원이 돼야 한다’던 프란치스코 교황과 ‘서로 밥이 되어 주라’던 김수환 추기경의 말을 소개했다. 명동성당이 배고픔의 설움과 분노로 고통받던 장발장을 거듭나게 한 미리엘 주교의 성소로 재탄생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명동밥집의 봉사자 신청 문의는 전화(02-727-2286)와 인터넷(naver.me/GxsSnGBI)으로 하면 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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