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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바둑의 신이 된 인공지능…‘기풍’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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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AI 닮기 위해 전력질주

‘나만의 길’ 찾기가 고수들 과제

중앙일보

일러스트 김회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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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영화 ‘엑스 마키나(Ex Machina)’나 미국 드라마 ‘웨스트월드(Westworld)’에서는 인공지능(AI)이 인간을 닮기 위해 분투한다. 바둑 동네는 정반대다. 모든 프로기사가 AI를 닮기 위해 밤낮으로 분투한다. 최고수인 신진서 9단의 별명은 ‘신공지능’이다. AI와 가장 유사하다는 의미인데 이게 칭찬인가 싶어 뭔지 모르게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AI는 바둑의 신이 됐다. 종교의 신과 달리 실시간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해 보여주는 신이다. AI는 불행히도 말이 없다. 수를 가르쳐 주지만 설명은 없다. 따라서 AI의 의중을 어떻게 해독하느냐가 바둑 공부는 물론 승부의 핵심이 됐다.

모두가 전적으로 AI에 몰두하면서 바둑 인문학의 상징이었던 ‘기풍(棋風)’이 사라지고 있다. 다케미야의 우주류, 조훈현의 속력행마, 이창호의 아득한 인내…. 이런 것들은 반집을 다투는 메마른 승부 세계에서 촉촉한 향기를 토해내곤 했다. 폭파전문가 조치훈은 어떤가,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이세돌의 치열함도 그립다. 지금은 ‘AI 닮기’에 전력 질주하는 시대. 각자의 스타일은 존재감을 잃고 저 멀리 사라지고 있다.

서봉수 9단은 예전부터 ‘기풍’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바둑의 신이 본다면 정수와 실수가 있을 뿐이다”고 말하곤 했다. 이제 AI라는 바둑의 신이 도래했는데 어떨까. AI의 눈엔 정수와 실수만 있을까. 그건 아니다. AI는 항상 판 전체를 보며 큰 그림을 그린다. AI의 수들은 천변만화하며 수마다 긴 스토리를 담고 있다. 인간은 그 ‘복잡한’ 진실을 다 이해하기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AI에겐 기풍이 없다는 것이다.

바둑에서 기풍이 사라진다는 것은 사람에게서 감정이 사라지고 이성만 남는 것과 같을지 모른다. 이런 걱정에 대해 유창혁 9단은 “그래도 (인간 고수들은) 각자의 길을 갈 것이다”고 말한다. AI 세상이지만 고수들은 저마다 ‘나만의 길 찾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AI는 혁명적이다. 바둑판 위의 금기란 금기는 모조리 깨뜨렸다. 대신 새로운 정석과 포석을 하사했다. 프로기사는 AI 정석과 포석을 모조리 외운다. AI 닮기의 첫 단계다. 그러나 이건 실제 승부에선 별 도움이 안 된다. 어딘가 저쪽에 돌의 배치가 하나만 달라지면 정석과 포석도 달라진다. 돌이 하나 움직이면 판 전체가 달라진다. 전략도 달라진다. 북경의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뉴욕에 폭풍이 온다는 혼돈이론은 AI의 바둑판에서도 유효하다.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왜 달라지는가. AI는 말이 없다.

여기서 AI 닮기의 다음 단계가 시작된다. AI의 거침없는 사석전법과 두려움을 모르는 전투는 현대 프로기사들을 모두 ‘전사’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AI는 어느 순간 아침 호수처럼 평화롭게 변한다. 삶과 죽음에 무심하다. 도를 통하지 않는 한 인간이 AI를 꼭 닮을 수는 없다. 범인은 AI만 바라보다가 바보가 될 지경이다.

바둑기사들에게 철학적인 시간이 찾아왔다. AI 닮기에 전력을 다하면서 어떻게 나만의 길을 찾아낼 것인가.

알파고의 후예들이 바둑 세상을 점령했다. 이곳에서 인간은 자신이 만든 AI를 신으로 떠받들고 있다. 이 풍경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AI가 신이 되는 이 짧은 과정을 지켜보면서 종종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게 인간사회의 다른 분야까지 확대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진짜 확대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수많은 신들이 새로 탄생할까. ‘웨스트월드’나 ‘엑스 마키나’ 같은 스토리가 현실이 되는 것인가.

이런 걱정은 접어두자. 우선은 기풍이라고 하는 개개인의 향기가 사라지고 조금씩 획일화되어가는 바둑 동네에서 인간 고수들이 ‘나만의 길’을 찾아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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