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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아버지 관엔 물만 가득했다" 여든 아들의 사할린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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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한수산의 기록-일제 강제동원, 빼앗긴 가족들

중앙일보

형제들을 대신해 일제에 끌려간 사할린의 조선인 징용공은 광복 뒤엔 무국적자가 됐다. 그렇게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고(故) 이석동씨는 헤어진 지 36년 만에 편지로만 만날 수 있었던 아들 이희권씨에게 젊은 시절 가장 멋부리고 찍은 사진을 보냈다. "혹시 사할린에 내 이복동생은 없느냐"고 묻는 아들에게 그는 "여기서 가족을 만들면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했다. 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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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광복 75년. 일제 수탈에 배가 곯던 가족과 고향을 뒤로하고 끌려가야 했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780만 명. 푸르게 싱싱한 스무 살 안팎 조선의 청춘들은 암울했던 한국 현대사의 어둠을 지나며 죽거나 다치거나 살아서 돌아왔다. 그리고 75년이 흘렀다. 겨우 걸음마를 떼던 돌잡이 아들이, 어머니 배 속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그리며 살아온 딸이 이제는 백발이 휘날리는 노년이 돼 늙어 간다. 아버지 없이 살아내야 했던 유가족들의 가족사 75년. 그들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메말라버린 눈물의 고백이 아니다. 만날 수 없던 아버지의 빈자리를 살아야 했던 그들에겐 통절한 고난, 마침내 이룩한 인간 승리의 장엄함이 혼재한다. 아버지의 유해를 먼 해외에서 모셔오고, 유가족 배상운동에 몸 바쳐 싸웠지만 노년에 찾아온 건 빈손의 가난뿐. ‘위안부 할머니에게도 딸은 있습니다’ 눈물로 뒤엉키는 회상도 있다. 아버지가 스러져간 남양제도의 망망한 바다에 꽃을 바치는 그들의 주름진 얼굴은 우리 역사의 거울이다. 일제강점기 피해자 유가족, 그들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은 어떻게 세월을 견뎌내고 살아남았는가. 파란의 한국사 그 공간의 씨줄과 시대의 날줄 속을 지나온 유가족의 지난했던 삶의 궤적을 작가 한수산이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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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살 때 헤어져 끝내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떠내보낸 아버지. 아들 이희권씨에게 남은 것은 빛 바랜 편지와 사진 몇 장 뿐이다. 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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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5남매의 셋째였습니다. 형제 중에 누구든 하나는 가야 하니, 네가 가 고생하고 오너라 해서 끌려가셨다고 하는데, 내가 네 살 때 일이라 어디로 가셨는지도 모르면서 '홋카이도에서도 3000리 떨어진 먼 곳'으로 갔다고, 그렇게만 알고 컸지요.”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고(故) 이석동씨의 아드님, 이희권(80)씨의 회상은 담담하게 이어졌다.

해방을 맞았지만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젊은 아내는 달 밝은 밤이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냇가로 나가 흰 사발에 물을 떠놓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빌었다. 어린 아들 이희권씨의 가슴에 각인된 이 모습만은 세월에도 녹슬지 않는 기억으로 남았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큰아버지를 따라 먼저 피란길에 나선 아들과 어머니는 길이 엇갈리면서 행방불명. 모자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생이별을 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하루아침에 외톨이가 된 아들은 큰아버지 집에서 더부살이로 자랐다.

“왜 학교도 보내주지 않았나 모르겠어요. 국민학교도 중퇴하고 농사일만 했으니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되었지요.”

1965년 10월 육군을 만기 제대하고 돌아온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출했다. 들고 나갈 가방조차 없어 군에서 제대할 때 메고 온 군용백에 짐을 싸 서울역에 내렸고, 노숙으로 버텼다.

일자리를 찾아 나선 끝에 한강변 구의동의 벽돌공장에서 홀로서기가 시작됐다. 벽돌을 짊어진 어깨와 등판이 짓무르는 고통을 견뎌내고, 냉동식품 수출회사 풍양산업에 입사, 회사에서 만난 여사원 이영화씨와 싹튼 사랑이 결혼까지 이어졌다. 어느새 그의 나이 스물아홉, 꽃보다 고운 신부는 스물두 살이었다. 결혼식에서 신랑·신부의 절을 받은 분이 작은어머니였다. 부모가 없다는 상실감과 나는 혼자였구나 하는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왜 이분이 절을 받아야 하는가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데, 그렇게 슬플 수가 없어요. 아버지·어머니 생각이 그렇게 나는데…. 얼마나 슬프던지.”

비 내린 땅도 언젠가는 마르리라 믿었다. 맏아들에 이어 둘째가 태어났고, 조금씩 살림도 일궈나갔다.

돈을 벌기 위해 대림건설의 사우디아라비아 해외 건설현장에도 다녀왔고, 귀국 후에는 영인운수의 좌석버스 기사가 됐다. 가장으로서 ‘그저, 바르게, 열심히만 살자’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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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으로 끌려갔던 강제징용 피해자 이석동씨가 고향에 두고 온 아들 희권씨를 찾고 있다는 월간지 〈마당〉의 1980년 기사. 이 기사 덕분에 부자는 극적인 편지 상봉을 할 수 있었다. 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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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6촌 조카가 놀라운 연락을 해왔다. 아버지가 사할린에 살아계신다는 것이었다. 월간지 〈마당〉 1980년 4월호에 조양욱 기자가 쓴 기사였다. 경기도 파주 출신의 이석동씨. 고향 떠난 지 38년, 네 살 때 헤어진 아들의 소식을 묻고 있었다.

‘희권이가 잘 자라서 성인이 됐는지? 잘 컸으면 지금 42세가 됐을 것이다. 희권이 모친도 살아 있는지?’

마흔이 된 아들의 나이조차 마흔 두살로 기억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편지가 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시작됐다. 미수교국 소련에서 일본으로 편지를 보내면 그것이 다시 대구의 중소이산가족회를 통해 아들에게 배달됐다. 몇 달이 걸릴 때도 있었다.

‘나는 혼자 독신생활로서 섭섭하나, 일상생활에서는 아무런 근심걱정은 없으므로 다행인 줄 짐작해라.’ '나는 서산에 지는 해와 같다. 머지않아 80을 내다보니 원통함을 누구에게 말할꼬. 참으로 기막힐 일이 아닐 수 없구나.' 편지를 읽자면 반가움보다 먼저 이산의 슬픔으로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니 언젠가는 모시고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나날이 흘러갔다. 어느새 맏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고, 첫 손자의 출생을 알려왔다. 둘째아들도 결혼해 연년생으로 두 손자를 안겨주었다. 해가 지나고, 맏아들이 뉴욕의 대학에서 교수가 됐다는 기쁨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기쁨의 옆방에는 슬픔이 산다. 1987년 사할린으로부터 비보가 날아들었다. 친구 이용하씨가 보낸 편지였다.

‘희권. 그동안 잘 잇슨나. 자네한테 섭섭한 멧 말을 전하고자 한다. 아버님이 세상을 뜨고…. 사망 날은 양력 5월 24일 아침 6시경, 장사는 29일날 모시었다.’ 사할린에서 보낸 편지가 일본을 거쳐 전해지기까지, 두 달이 지나서야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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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권씨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도 편지로 들었다. 36년의 이별 끝에 부자는 편지로나마 애틋한 정을 이어갔지만, 이조차 채 7년을 넘기지 못했다. 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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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을 대신해 일제의 징용에 끌려갔다. 해방을 맞았지만 미수교국으로 길이 막힌 그에게 조국은 없었다. 겨울이면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얼어붙은 땅 사할린에서 무국적자로 살았다. 아내와 자식이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일념에서 독신으로 살았던 한 사나이의 삶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잊지 않고 간직했던 고향 주소도, 베갯머리를 눈물로 적시던 고향 길도 움켜쥔 손아귀에서 모래처럼 흘러내리며 그는 흙으로 돌아갔다. 아들과 편지 왕래를 한 지 겨우 5년 만의 이별이었다.

시간이 흘러 1990년 소련과의 국교가 정상화된다. 그리고 정부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 진상조사를 진행하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황당한 일들이 벌어졌다.

“2007년 11월, 국가로부터 아버지 ‘이석동을 특별법 제17조에 의거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로 결정함’이라는 통지서를 받았어요. 강서구청에 가 보상 신청을 하라고 해서 찾아가니, 1945년 8월 이전 사망자에 한해서만 보상을 한다네요. 도대체 뭐 이런 나라가 있나, 돌아설 수밖에 없었지요. 그 후에도 기한을 연장한 또 한 번의 기회가 있었다는데, 그것조차 통지를 안 해주니 모르고 지나쳤지요. 국가의 보상 같은 건 잊고 살았습니다.”

2011년 여름 정부는 사할린 한인묘에 대한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이 실태조사를 통해 아버지가 사할린 홈스크 지역 피치레치예 묘지에 안장돼 있음이 확인된다. 묘지번호 027-02-070, 고인 이름 리석동, 성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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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고자로 처리돼 사실상 방치돼 있던 이석동씨의 사할린 묘지. 아버지의 관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본 이희권씨는 또 한 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2018년 가을, 이희권씨는 아들과 함께 사할린으로 떠났다. 처음 밟는 땅, 사할린은 이미 가을이 깊어 하늘을 뒤덮듯 솟아오른 자작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바로 차를 달려 세 시간, 묘지에 도착했다. 허리가 넘게 자란 잡초들을 제거하고, 술을 올리며 두 번 절하고 났을 때였다. 언제 그렇게 많은 눈물이 고여 있었던가.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눈물이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왔다. 안내해 주던 한인회의 교민마저 함께 흐느껴 울어야 했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왜 부르기만 해도 눈물이 흐르는가. 손등으로 눈 밑을 닦아내는 이희권씨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어머니와 헤어진 게 열한 살, 어머니한테는 얻어터지고 야단맞은 거밖에 생각이 안 나요.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더 엄하게 키우려고 그랬겠지요. 그런데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는 왜 그다지도 그립고, 보고 싶었는지 모르겠어요.”

지난해 10월 열네 분의 유해를 모셔오는 제7차 사할린 유해봉환사업의 일환으로 이희권씨는 현지로 출발했다. 다음 날 무덤을 헤치면서였다. 사할린은 춥기 때문에 깊게 묻는다고 했지만, 아무리 파도 유해가 보이지 않자 아버지를 못 찾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이 스며들었다. 얼마를 더 파내려 가서야 질척거리는 물속으로 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젖어서 흐늘흐늘한 옷가지에 싸인 유해는 수습할 뼈도 별로 없이 삭아 있었지만 관 속의 모습은 평상시 옷차림 그대로였다. 구두도 신은 채였다. 지갑과 면도기 하나, 또 한 켤레의 구두가 유품으로 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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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빼앗아가고 전쟁이 갈라놔도 피는 속일 수 없다. 이희권씨의 손자 호준(11ㆍ가운데)이는 증조할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할아버지인 줄 알았다. 똑같이 생겼다"고 했다. 어린 호준이도 증조할아버지의 유해와 보낸 첫 밤, 할아버지가 얼마나 울었는지 기억했다. 이희권씨의 부인 이영화(73ㆍ왼쪽)씨는 "살림이 조금만 괜찮았어도 시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 어떻게든 사할린으로 찾아가 얼굴을 뵀을 텐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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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에 싸인 아버지의 귀환은 조국의 정중한 의전 속에 국립 ‘망향의 동산’으로 이어졌다. 뼈가 돼 돌아올 때까지 고향을 떠나 80여 년. 길고 길었던 세월을 건너 서울 가양동 아들의 아파트로 들어선 아버지는 증손자까지, 온 가족과 함께 첫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선산에 묻혔다. 아들은 묘비에,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는 어머니 유인벽진이씨(孺人碧珍李氏) 옆에 전주이공석동(全州李公錫東)이라고 두 분의 이름을 새겼다.

“섭섭함이야 많지만 국가나 정부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유해를 모셔올 수 있었던 사람 아닙니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겠지요. 지금요? 손주들과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결코 그리고 끝내,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고 산 아버지와 아들의 삶. 역사에 밟히고 시대에 잊혀도 마침내 일어서는 이 민초의 삶은 고결하다. 아들에게서 손자로 흘러가는 삶의 물결이 자신의 뒤를 장엄하게 이어가고 있음을 고인은 아시리라. 고이 잠드소서. 이제 평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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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권씨의 가족 사진. 혼자라는 상실감 속에서도 행복한 대가족을 일궜다. 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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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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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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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이 조선이다.”

한수산 작가의 소설 『군함도』는 일본에 끌려간 징용공의 이 말로 시작한다. 중앙일보 광복 75주년 기획 '일제 강제동원, 빼앗긴 가족들'은 징용공이 그토록 그리워 했던 ‘저쪽 조선’에 남았던 아들딸들의 이야기다.

그의 소설 속에서 목숨을 걸고 군함도 탈출을 시도한 조선인들은 징용공이기 전에 아버지였다. 27년간의 조사와 고증 끝에 군함도로 끌려간 아버지들의 사투를 소설로 완성한 한수산 작가가 이제 남겨졌던 강제 동원 피해자 아들딸들의 생존기를 중앙일보에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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