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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종합] `유 퀴즈 온 더 블럭` 광복절 특집…한순옥 여사 "도시락 폭탄 운반한 유모차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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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스타투데이 박새롬 객원기자]

한도원 독립운동가의 딸 한순옥 여사가 이봉창 의사의 '도시락 폭탄'을 운반한 유모차 속에 폭탄과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

12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제75주년 광복절을 맞아 대한민국 독립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유재석과 조세호는 '보통 사람들의 역사 수집가' 박건호, 유관순 열사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던 심영식 애국지사의 아들 문수일, 한도원 독립운동가 딸 한순옥 여사, 전세계를 돌며 독립운동의 흔적을 담는 김동우 사진작가를 만나봤다.

박건호 수집가는 일제 시대 때 우표에서 금강산이 너무 높아 산을 낮게 그리게 한 우표의 변천사를 알려줬다. 조세호는 자신의 우표 수집책을 공개하며 "제가 수집한 우표 중 사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지만 박건호는 "요즘 우표 수집 하는 분이 너무 많다"며 수집책을 금방 닫아 웃음을 자아냈다.

박건호는 "우표 수집책의 가치는 10만원 정도"라고 말했고 조세호는 "30년을 모은 건데"라며 아쉬워했다. 유재석은 "내가 20만원에 사겠다. 오늘 사면 15만원"이라고 말했다. 조세호는 급기야 "가실 때 들고 가시라"고 말했다.

박건호는 이어 일장기 같은 태극기도 보였다. 그는 "해방 직후엔 태극기가 없어 일장기에 급하게 그린 것"이라며 일장기를 재활용한 태극기를 펼쳐보였다. 건곤감괘를 그리다 빨리 독립만세를 외치고 싶은 열망에 뒤로 갈수록 대충 그린 모습도 보였다.

박건호는 손기정의 친필 사인도 꺼냈다. 그는 "손기정이 우승 후 그의 한글 이름으로 서명을 했고 다른 글씨에 비해 한글 글씨가 크다"고 설명했다. 손기정은 마라톤 우승 직후 고향 친구에게 보낸 손편지에 '슬프다'는 세 글자를 적어 보냈다.

조세호는 감동 받은 얼굴로 "수업을 잘 못 듣는데 집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재석은 "계속 선생님 말씀하실 때 물건을 뒤지더라"고 폭로했다.

박건호는 이완용의 붓글씨를 가지고 있다는 의아한 사실도 밝혔다. 그는 "가격이 20만~40만원 정도밖에 안 한다"며 "안중근 의사의 글씨와는 100배 이상 차이난다"고 말했다. 또 "아무리 글씨를 잘 쓴들 사람들이 침을 뱉고 싶어한다"고 덧붙였다. 안중근 의사의 글씨는 최소 5억에서 15억원을 호가한다고.

그는 "지금껏 수집한 것들 외에 구하고 싶은 게 있냐"는 유재석의 질문에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라 답했다. 그는 "며칠을 굶어도 배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가격이 높아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해도 살 수 없을 가격이라 말했다.

박건호 수집가는 "아무리 사소한 자료라도 사소한 사람과 역사는 없다"며 "모든 시간과 사람은 소중하고 위대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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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유관순 열사와 같이 수감됐던 심영식 애국지사의 아들 문수일 자기님이 등장해 어머니의 이야기를 전했다.

유재석과 조세호는 인천 미추홀구로 자리를 옮겨 서대문 형무소에 유관순 열사와 함께 수감됐던 심영식 애국지사의 아들 문수일 자기님을 만났다. 시각장애인이던 심영식은 맹학교를 나와 독립운동을 하다 유관순 열사와 함께 3평 남짓한 8호 감방에 갇혔다.

문수일은 "어머니가 개성에서 4명이 함께 독립운동을 주도했다고 하셨다. 치마 속에 태극기를 숨겨두고 다니셨다고 했다"고 말했다. 또 "유관순 열사는 감방에서도 말이 없는 편이고 차분했고 가끔 간수들에 불려나가곤 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는 "옥중 생활 이야기를 하셨는데, 간수한테 가끔 불려 나가서 뺨을 많이 맞았다. 그래서 한 쪽 고막이 터져서 돌아가실 때까지 한쪽 귀에서 고름이 나왔다고 했다"고 말했다. 또 "어머니가 자꾸 대드니까 맹인 주제에 무슨 독립운동이냐고 간수가 말하니 내가 눈이 멀었지 마음은 멀지 않았다고 말하셨다"고 말했다.

그는 "시각장애인이 감옥에 갇히는 건 감옥 안의 감옥에 또 갇힌 것이다. 어머니는 오로지 정신력으로 견뎌내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쓰시던 안경을 가져왔다. 그는 "돌아가실 때까지 쓰시던 안경"이라며 "지금 보니까 안경이 조그마하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는 어머니는 해방 후 독립유공자 신청을 못 했다고. 눈이 안 보여서 생전에 하지 못한 유공자 신청을 아들인 문수일이 돌아다니면서 노력했다고. 또 그는 더 자세히 기록하지 못했던 걸 아쉬워했다.

심영식 지사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갔다. 문수일은 중학교에 입학해야 하는데 어려운 형편에 돈이 없어 교복을 못 샀다. 군복을 물들여 교복으로 입고 다녔다고. 유재석은 "퀴즈를 내기보다 이 안에서 뽑으시면 선물을 드리겠다"고 말했고 문수일은 "뽑아달라"며 "내가 뽑아서 뭐가 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문수일은 "살면서 가장 큰 행운이 무엇이었냐"는 유재석의 질문에 "훌륭한 어머니를 만나 교육을 받고 여태껏 살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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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두 자기는 백범 김구 선생의 비밀 지령을 받았던 '밀정' 활동을 한 한도원 독립운동가의 딸인 한순옥 여사님을 만났다.

한순옥 여사는 "어렸을 땐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는지 몰랐다. 아버지가 없는 줄 알고 살았다"고 말했다. 또 "어렸을 적 주변 친구들이 쟤네는 아버지가 없다고 놀렸다"고 털어놨다.

그는 "저희는 엄마 아버지에게 자라지 않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자랐다. 아버지가 독립운동하느라 없는 줄 모르고 그냥 없는 걸로 알았다"고 전했다. 당시 신변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어른들은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던 것.

그는 "돌아가실 때 비석에 한 일이 나와있어서 그 때서야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비석에 적힌 아버지의 업적을 보고 "고생 많이 하셨구나란 걸 느꼈다"고 말했다. 그들의 부재로 힘들었던 과거지만 부모님이 자랑스러웠다고 전했다.

한순옥 여사의 아버지 한도원 독립운동가는 과거 상해에서 김구와 함께 했다. 한순옥 여사는 "김구 선생님이 우리 집에, 우리 집만이 아니고 동포 들 집에 이 집 저 집 옮겨다니며 다녔다"고 설명했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면 잡힐 수 있었기에 여기저기 방랑하며 다녔던 것.

한순옥 여사는 "동포들이 김구를 위해 새 침대를 마련해놓으면 아무 데나 들러서 눈을 붙이고 하루하루 일제의 감시를 피하며 다녔다"고 전했다. 또 "일본 사람들이 가끔 잡으러 오면 언제 도망갔는지 모르게 텅 빈 집을 보곤 했다"고 말했다. 아무도 없는 집을 보면 김구 선생이 잡혀간 줄 알았는데, 일본군이 허탕을 치고 가면 김구 선생이 나타났다고. 동포들이 "잡혀간 줄 알았다"고 하면 김구 선생은 "내가 왜 잡혀가냐"고 호쾌하게 답했다는 사실도 전했다.

한순옥 여사는 김구 선생의 친필 편지도 공개했다. 또 "저를 많이 예뻐해 주셨다"며 "다른 분들한텐 그냥 이름들만 써서 편지를 썼는데 저에겐 세손한테 준다고 썼다"고 말했다. 또 "세손이라고 쓴 건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상해에서의 기억이 쓰여있는 편지"라고 설명했다.

편지엔 '한순옥 세손에게 주노라. 너희 집에 상해에 있을 때 너의 집에 권총을 가지고 갔다. 총이 오발이 됐을 때 너는 뱃속에 있었다. 그??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잘 자라주어 고맙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한순옥 여사는 김구 선생에게 답장을 남겼다. 그는 "선생님 어떠세요? 천국에 가셨는데 많이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저도 열심히 살게요. 늘 열심히 살아서 좋은 사람 되겠습니다"라고 전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순옥 여사는 이봉창 의사의 도시락 폭탄을 운반한 유모차 속에 자신이 있었다고 밝혀 놀라움을 자아냈다. 한순옥 여사의 어머니는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아 유모차로 폭탄을 운반했다. 그 유모차 속에 있던 아기가 한순옥 여사였던 것이다.

그는 "그 도시락이 그 도시락이었던 건 훗날 알게 됐다"며 "당시 일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했는데, 김구 선생이 어머니 홍성실 여사에게 자금 관리를 맡겼다고 했다"고 밝혔다. 한순옥 여사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던 것.

한순옥 여사는 "소문으로 애들이 왜 쟤는 아버지가 없냐는 말을 하면 쟤네 부모님은 떼놈에게 잡혀갔다고 했다"며 상처 받은 과거를 떠올렸다. 또 "어렸을 때지만 그 말이 너무 싫어 한이 됐다"며 "아버지는 그런 줄도 몰랐지만 애들이 그러면 속상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아버지 면회 갔을 때의 기억도 떠올렸다. 일본군은 아버지가 지푸라기로 얼굴을 가리는 모자를 씌우고 양말도 신발도 신기지 않고 데려왔다고. 그래서 한순옥 여사는 아버지를 뵈러 갔어도 얼굴이 가려진 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

한순옥 여사는 해방이 되던 그 날만큼은 밝은 얼굴로 떠올렸다. 그는 "만세 부르고 태극기 두르고 뛰어다녔다"며 그 날은 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한순옥 여사는 "좋은 자리에 모셔줘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이날 방송엔 전세계를 돌며 독립운동 유적지와 후손들을 담는 김동우 사진작가도 등장했다. 그는 2년 가까이 지구 한 바퀴를 돌면서 세계 곳곳에 남아있는 독립운동의 유적지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또 거기서 만난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같이 기록했다.

그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전했다. 그는 여행을 하다 인도 델리 레드 포트란 곳에 갔다. 1943년에 아홉 명의 광복군들이 파견돼 영국군과 함께 훈련받던 곳이다. 임시정부는 일본어와 영어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9명의 인면전구공작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전선에서 일본군에 대항에 큰 성과를 거둔 이들이다.

그는 다닌 곳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으로 "캘리포니아의 윌로우스 비행학교 활주로 터"를 꼽았다. 약 7천 명 이상이 하와이로 이주했는데 그중 쌀농사를 하던 김종린이란 독립군이 있었다. 쌀값이 폭등해 돈을 많이 그는 비행장 부지와 운영자금으로 약 120억 원을 지원했다고.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과 함께 비행학교를 설립했다. 한인 청년들에게 비행과 정비, 통신 등 교육했고 수십명의 비행사를 양성했다. 이곳은 일제에게 큰 위협이자 한국 청년들에게 큰 희망이었던 대한민국 공군의 모태로 평가받는다.

김동우는 활주로를 보는 순간 "그 분들이 무슨 꿈을 가지고 활주로를 날았을까란 생각이 들었다"며 "안타까운 건 그곳이 우리의 모태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표시가 안 돼 있다"고 밝혔다.

유재석은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독립을 위해 싸운 수많은 영웅들이 계시지만, 우리가 몰랐던 수많은 분들이 독립을 위한 노력을 하셨는지 알리는 귀한 일을 하신다"고 말했다.

김동우는 "독립운동이 만주, 상해에서만 있던 게 아니다. 전 지구적으로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2년간의 작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처분했다고 밝혀 놀라움을 자아냈다. 유재석과 조세호는 깜짝 놀랐다. 또 "여행 갔다와서 처가살이를 했다"며 "가기 전엔 신문사 기자로 일했다"고 전했다.

김동우는 "내 꿈이 회사엔 없더라"며 "한 번 사는 건 데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게 맞는 건지' 고민을 했고, 이 일을 누군가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동우는 "국내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대부분 힘들게 살고 계신다. 또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 중엔 그걸 증명할 방법을 몰라서 잊혀진 채 힘들게 사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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