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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파견 60주년…함제도 신부 회고록 '선교사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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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 故장익 주교 권유로 1960년 한국행…청주교구 사목 30년·대북 지원 30년

북한 방문만 60여차례…"한국에서 보낸 60년은 '은총'"

연합뉴스

회고록 '선교사의 여행' 펴낸 함제도 신부
(서울=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올해로 한국에 온 지 60주년을 맞은 함제도(87·미국명 제라드 해먼드) 신부가 12일 서울 대방동성당 정규하관에서 회고록 '선교사의 여행' 출간기념 기자간담회를 마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eddie@yna.co.kr



(서울=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올해로 한국 파견 60주년을 맞은 푸른 눈의 선교사 함제도(87·미국명 제라드 해먼드) 신부가 자신의 생애를 풀어놨다.

'남북한을 사랑한 메리놀회 함제도 신부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회고록 '선교사의 여행(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은 신부가 되고서 60년간 남북한을 사랑하는 사제이자 선교사로 걸어온 길을 오롯이 담았다.

1933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메리놀 신학대를 졸업한 뒤 뉴욕 메리놀 선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메리놀 선교회는 가톨릭 외방 선교회 중 하나다.

함 신부는 1960년 한국행 배에 올랐고, 1989년까지 30년간 청주교구에서 신부로 일하며 남한 사람들의 친구가 됐다. 그해부터 또 다른 30년간은 메리놀회 한국지부장으로 있으면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사업을 폈다. 그는 그곳에서 결핵 환자 지원 사업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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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참석한 함제도 신부
(서울=연합뉴스) 올해로 한국에 온 지 60주년을 맞은 함제도 신부가 12일 서울 대방동성당 정규하관에서 회고록 '선교사의 여행'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데에는 1951년 고등학교인 메리놀 소신학교를 다닐 때 만난 고(故) 장익 주교의 역할이 컸다.

안타깝게도 장 주교는 지난 5일 노환으로 선종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당시 한국어 개인 교사를 했을 정도로 영어는 물론 독일어와 프랑스어 등 외국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그는 친구를 기억했다.

장 주교를 '불알친구'라고 부르는 함 신부는 소신학교를 다니며 깊은 우정을 쌓았고, 운명처럼 첫 선교지로 한국을 택했다.

"소신학교에서 평생의 친구 장익을 만났습니다. 장익과 같이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한국에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장익을 만난 다음이에요. 초등학교에 다닐 때 수녀님들이 해외 선교를 말씀하실 때는 주로 중국 선교였거든요. 장익이 제게 한국에 가자고 했죠."(본문 32쪽 중)

한국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선교지였으나 가족에게서 환영받지는 못했다. 한국 하면 전쟁만 생각났던 함 신부의 식구들은 한국에 간다는 그의 전화를 받고서 울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는 청주교구에서 사목하며 북문로·수동·괴산 성당에서 주임신부로 일했다. 1930년대 평안도에서 사목했던 제임스 파르디 주교의 비서를 지내며 북한 선교를 위해 기도했다. 외국인 선교사이자 교구 총대리로서 유신시절을 보냈다.

생애 구술록에는 북한 선교에 관한 그의 마음가짐과 경험도 고스란히 담겼다.

함 신부는 1988년 북한 내 유일한 성당인 장충성당이 완공되고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를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당시 장 주교는 교황청에서 보낸 교황 특사 일행과 함께 평양을 방문해 첫 미사를 올렸다. 함 신부는 이때는 가지 못했으나 이후 그들이 갔던 길을 따라 북한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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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북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는 너무너무 좋았어요. 소원이었으니까. 하지만 신자들과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나요. 고해성사를 주기도 어렵고."(본문 136쪽 중)

그는 1998년부터 개신교계 구호단체인 유진벨 재단과 북한 결핵 환자 지원사업에 나섰다. 매년 두 차례씩 북한을 방문해 직접 사업을 챙겼고, 그렇게 북한을 방문한 횟수만 60여차례가 넘었다.

함 신부에게 북한은 과거 남한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었다. 옛날 남한에 배고픈 사람이 많았던 것처럼 북한도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60년 전 청주교구에서 했던 일과 비슷한 일을 북한에서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북한 선교가 뜻대로 진전되지 않는 것에 대해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남북한 간 다리가 놓일 때 그 다리에 사용될 단단한 '자갈' 같은 존재가 됐으면 한다고 바랐다.

"사실 제가 생각하는 선교사의 역할은 '다리'예요. 다리를 건설하려면 자갈이 필요하잖아요. 나중에 남과 북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 때 선교사가 그 '다리'를 단단하게 하는 자갈이 된다면 그 소임을 다 한 거 같아요."(본문 163쪽 중)

한국에서 보낸 지난 60년을 '은총'이라고 말하는 함 신부는 1972년 청주 수동성당에서 한복을 입고서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열었던 일도 떠올렸다. 한국으로 이주해 아들과 함께 살고 싶었던 어머니는 미국에 돌아간 뒤 암 투병을 하다 3년 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사제이자 선교사로 평생을 한국에서 보낸 그에게 남은 소망은 무엇일까.

"제가 해야 할 일은 이제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든지 잘 들어주는 겁니다. 요즘 사람들은 잘 듣지 않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어줄 시간이 별로 없어서일까요? 저 역시 이제 다른 사람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줄 수는 없어요. 그래도 적어도 존중하며 들어줄 수는 있습니다."(본문 207-208쪽 중)

그의 회고록은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가톨릭 구술사 채록 2019'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향규·고민정·김혜인 씨 등 세 명의 연구자가 함 신부의 말을 기록하고 정리했다.

edd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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