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비쳐진 예수의 모습
그리스도의 첫번째 유혹(2019) |
브라질 코미디 영화 ‘그리스도의 첫번째 유혹’은 이렇게 속삭인다. “너 그거 아니? 사실 예수는 말야….” 영화 속 예수는 서른 살 생일을 맞아 ‘남자친구’인 올랜도를 가족들에게 소개하고, 올랜도는 노래를 통해 둘 사이의 성적 관계를 암시한다. 이런 도발적인 설정이 공개되자 종교계는 물론 정치권까지 들끓었고, 영화사엔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영화사 측은 “브라질은 사랑으로 혐오의 고통에서 살아남을 것이며, 표현의 자유와 함께 승리할 것”이라고 항변했으나 법원은 끝내 상영금지 처분을 내렸다. 신성모독이란 이유였다.
지난달 미국에서는 독립영화 ‘해빗’의 상영반대 청원이 올라 시민 수십만명이 서명을 했다. 마이클 잭슨의 딸 패리스 잭슨이 예수로 등장하는 설정, 2018년 커밍아웃한 그의 성정체성이 문제가 된 것이다. 막바지 작업에 들어간 이 영화가 무탈히 개봉할지는 미지수다.
예수를 은유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으로 그려내는 일은 언제나 문제적이다. 교회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예수를 스크린에 담으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렬한 메시지가 되기 때문이다. 금기를 다루는 데서 오는 흥분감, 익숙한 것을 뒤집을 때 오는 쾌감은 영화적 가치를 더한다.
댄 브라운 원작의 영화 ‘다빈치 코드’(2006)는 종교적 긴장을 상업적으로 가장 잘 활용한 영화로 평가된다. ‘시온수도회가 숨기고 있는 예수-막달라 마리아의 핏줄을 찾는다’는 큰 줄거리에서 볼 수 있듯 영화 전반이 음모론적 시각에 기초해 있으나, 성경을 근거로 한 나름의 논리와 해석을 덧대 서사적 완성도와 몰입감을 높였다.
다빈치 코드(2006) |
물론 성서의 상업화, 성경의 자의적 해석 등 여러 지점에서 종교영화는 비판의 여지를 안고 있으며, 때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다툼은 외려 종교의 확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카톨릭 교황청과 개신교에서 잇따라 내놓은 ‘다빈치 코드 반박서적’들은 기존의 성경 논리를 정교화하고, 재확인하는 등 또 다른 결집을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기존 서사를 뒤틀기보다 ‘A.D. 더 바이블 컨티뉴스’(2015)처럼 성경의 현실화에 주력한 작품도 있다. 사실 1980년대 이전의 종교영화란 거의 다 이런 기조에서 만들어졌다. 예수가 죽고난 뒤 예루살렘의 상황을 그린 이 작품은 활자화된 성경이 스크린에 구현되기만 하더라도 그 자체로 수준 높은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이런 접근은 성경 내용을 잘 모르는 비기독교인, 비종교인에겐 아무래도 호소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2014년 개봉한 영화 ‘신은 죽지 않았다’는 여러모로 영리한 종교영화로 꼽힌다. 현대 캠퍼스를 배경으로 지독한 무신론자 교수와 독실한 기독교인 신입생의 첨예한 대립 구도를 보여줌으로써 비종교인들의 흥미를 끌고, 은연중 ‘포교’라는 종교적 목적을 달성한다.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기독교적 가치를 설파하고 있는 셈인데, ‘신의 존재’를 놓고 펼쳐지는 논리대결은 평소 기독교인들이 가진 판타지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준다.
메시아(2020) |
물론 종교는 문제 제기의 수단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사실상 재림예수를 그리는 올해 최고의 문제작, 미드 ‘메시아’는 언뜻 모래 폭풍을 일으키고 물 위를 걷는 주인공 청년의 정체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이나, 본질적으론 ‘믿음이란 과연 무엇이냐’는 질문에 방점이 찍혀 있다. “(스스로 생각하도록) 어떤 답도 주지 않으려 했다”는 기획자의 말에 그 의도가 드러나는데, 말하자면 비일상적인 고민거리를 던지기 위한 장치로 종교가 소환된 것이다.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1979) |
꼭 종교 철학적 차원이 아니더라도 영화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1979)처럼 종교영화는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어떤 권위들에 대한 도전으로도 해석된다. 예수의 바로 옆집에서 태어난 브라이언이 십자가에 매달릴 때까지 겪는 온갖 해프닝은 실은 기독교에 대한 조롱이라기보단,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엄숙주의에 대한 풍자적 비판이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무수한 반발에도 예수가 영화의 질료가 되어 때로는 유색인종, 때로는 동성애자, 때로는 여성으로 그려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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