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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만 4건… 행정명령에 중독된 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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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여세 면제·실업수당 연장 등 의회서 막히자 줄줄이 행정명령… 감세 카드로 지지율 회복 노려

조선일보

트럼프 대통령이 8일 뉴저지주 본인 소유 골프장에서 서명한 행정명령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날 트럼프는 4건의 행정명령을 한꺼번에 내렸다.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8일(현지 시각) 뉴저지주에 있는 본인 소유의 골프장에 앉아 네 건의 행정명령(executive order)에 서명했다. 연봉 10만달러(약 1억1800만원) 이하 소득자에 대한 급여세 징수 유예, 추가실업수당 연장, 연말까지 학자금 상환 유예, 세입자 강제 퇴거 유예 등 코로나로 인한 경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긴급 조치라고 했다.

문제는 관련 내용이 의회에서 논의되고 있는데도 트럼프가 기습적으로 결정을 내렸다는 데 있다. 특히 중산층에까지 급여세를 감면하는 것은 여야 모두 반대하고 있는 데다, 세제 유예·중단은 의회 고유 권한이라 '삼권 분립 침해'라는 논란이 즉각 일었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가 감세(減稅) 카드로 지지율 반전을 노리고 서둘러 행정명령을 내린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그는 "재선이 되면 급여세를 영구 감면하겠다"고 했다.

그는 집권 이후부터 온갖 문제에 행정명령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다. 그는 지금까지 행정명령 182건을 내렸는데, 이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재선 임기 4년간 내린 행정명령(129건)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최근에만 해도 소셜미디어 콘텐츠 검열 규제, 최측근 사면, 홍콩 특별대우 종식 등에 대한 행정명령을 잇달아 내렸다. 올 들어 현재까지 내린 것만 45건이다.

그는 행정명령을 꺼내 들 때마다 "헌법 2조에 대통령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는 절대적 권리가 있다고 돼 있다"고 주장한다. 행정명령 제도가 헌법 2조의 '행정권은 미 대통령에 속한다'는 구절에 근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행정권'을 '대통령이 뭐든 마음대로 할 권리'로 본다는 게 문제다.

대통령중심제인 미국에서 행정명령은 대통령이 의회 입법을 거치지 않고도 연방법 입법에 준하는 효력을 가진 조치를 내릴 수 있는 장치다. 역대 대통령들은 핵심 국정 과제를 관철해야 할 때나, 전쟁·대공황 등 의회 입법을 기다리기 힘든 특수한 상황에서 주로 발동했다. 링컨의 노예 해방도 행정명령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즉흥적인 아이디어 실현 창구나 흥정 수단으로 남발해왔다. 이 때문에 송사에 휘말리는 일이 잦았다. 그는 6일엔 중국 동영상 공유앱 '틱톡'에 대해 "45일 뒤부터 틱톡의 모회사(바이트댄스)와 거래를 금지한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는데, 틱톡은 위헌 소송을 낼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2017년 취임 첫날 내린 1호 행정명령인 '오바마케어(전 국민 의료보험 의무가입제) 폐지'는 국민 반발로 무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행정명령 서명식을 '화려한 쇼'로 포장해 정치적으로 활용한다. 서명식을 열 때마다 각료와 의원, 국민을 세워놓고 본인 이름을 크게 서명한 뒤 서명에 사용된 것과 똑같은 금장펜을 나눠준다. 이런 의식은 과거 민권법 통과 같은 역사적 서명식에서나 볼 수 있던 장면이다. 그가 올해 서명식을 열지 않은 건 지난 6월 '러시아 스캔들'에 연루된 최측근 로저 스톤을 사면하기 위해 내린 행정명령뿐이었다. 브루킹스 연구소는 "트럼프 정권 들어 행정명령 서명식이 과도하게 화려한 쇼가 됐다"면서 그가 행정명령 '형식'에 매료됐을 수 있다고 했다.

트럼프의 행정명령 남발에 대해 NBC방송은 "코로나 대응 실패와 지지율 하락으로 수세에 몰리자, 다른 이슈로 시선을 돌리고 자신의 입지를 공세로 전환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LA타임스는 "트럼프는 장관에게 전화 한 통 하면 될 일까지 행정명령으로 포장한다"면서 "졸속으로 만들다 보니 각 부처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태반"이라고 했다.

미국 일각에선 트럼프가 정치적 위기에 몰리면 대선일 연기나 우편 투표 금지 같은 것도 행정명령으로 강행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경우 위헌 소송으로 나라가 마비될 것이라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행정명령(executive order)

미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의 권한으로 발동하는 명령. 의회를 거치지 않지만 연방법률 입법과 비슷한 효력을 가진다. 해당 대통령 임기 내에는 유효하지만 다음 대통령이 취소할 수 있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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