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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81년 태풍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시름 잠긴 섬진강변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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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섬진강 범람으로 침수된 구례읍내

순식간에 물에 잠긴 터전

“아침 8시께 이미 발목까지…10시에 완전 침수”

단전·단수에 복구 ‘막막’

“뒤집힌 물건 꺼낼 엄두 안 나…수돗물 끊겨 괴롭다”

기름 유출에 두통·재산피해 호소

“기름기만 아니었어도…과일 모두 버려야”


한겨레

9일 오전 전남 구례군 구례읍 5일시장 상인들이 물에 젖은 물건들을 밖으로 빼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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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갑자기 무섭게 들어오더라니까. 물건이고 뭐고 차 타고 바로 빠져나와버렸어.”

9일 오전 전남 구례군 구례읍 봉동리 구례5일시장 입구에서 철골자재를 판매하는 김치수(57)씨는 물에 젖은 물건들을 밖으로 내다 놓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전날 오전 성인 남성 가슴 높이까지 물이 차며 자재 대부분이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전날 섬진강 하류인 토지면 송정리 쪽에서 홍수가 났다고 해서 아침 8시께 가게에 나와봤는데 물이 이미 발목까지 들어찼었다. 가만히 있다간 차도 잠길 것 같아 얼른 피했다. 오전 10시가 되니까 다 잠겨버리더라”고 긴박했던 상황을 되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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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군 구례5일시장 입구에서 건축자재를 판매하는 김치수씨가 전날 물이 찼던 높이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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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5일시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천장까지 흙탕물을 뒤집어쓴 차들이 널브러져 있고, 점포 안 상품들은 뒤죽박죽 엉켜 있었다. 시장 통로는 진흙으로 덮여 장화를 신지 않으면 통행이 어려운 지경이었다. 전날 장날을 맞아 물건을 내어놓으며 장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상인 300여명은 물건들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한 채 고스란히 피해를 봤다.

‘장수네약방’을 운영하는 유영태(72)씨는 “물이 천장까지 찼다. 가게 안쪽 방에서 거주하고 있는데 물건이 뒤집혀 있어서 빼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수돗물이 끊겨 씻을 수가 없으니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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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전 전남 구례군 구례읍 장안아파트 주민들이 물에 젖은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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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와 전기가 끊긴 마당에 인근 주유소와 숙박업소에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름에서 나는 매캐한 냄새 때문에 상인들은 “머리까지 지끈거린다”고 호소했다.

흙탕물에 젖은 복숭아, 수박 등을 밖으로 내어놓던 서울청과 이용희(53) 사장은 사람들이 과일을 집어가려고 하자 애써 말렸다. 기름 묻은 과일을 먹고 탈이 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기름기만 아니었으면 씻어서 싼값에라도 팔 계획이었는데 모두 버려야겠다”고 말했다.

구례읍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로 이번 장마로 1층이 물에 잠긴 장안아파트 현관에서 만난 김수복(70)씨는 “1981년에도 태풍(‘아그네스’) 때문에 침수 피해가 있긴 했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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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군 구례읍 침수 피해를 일으킨 서시천의 무너진 제방. 이곳을 통해 섬진강 물이 역류하며 구례 시가지가 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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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에서 남원으로 통하는 국도 17호선 서시1교 인근에서는 무너진 제방과 도로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전날 이곳 제방 40m가 무너져 내리며 강물이 구례읍내를 덮쳤다. 아침 6시30분 섬진강댐에서 방류를 시작하면서 섬진강 지류인 서시천이 섬진강으로 합류하지 못하고 둑을 무너뜨린 것으로 추정됐다.

구례 주민들은 섬진강 상류 섬진강댐(전북 임실)과 보성강 상류 주암댐(전남 순천) 수문을 한꺼번에 개방하며 빚어진 인재라고 지적했다. 섬진강 상류인 전북 남원시 금지면 귀석리 금곡교 인근 제방도 전날 낮 12시50분께 무너지며 4개 마을 주민 300여명이 긴급 대피했다. 이을재(71) 구례5일시장 상인회장은 “비가 계속 오더라도 사전에 수문을 열어 조절했으면 이렇게 물난리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문을 열더라도 미리 통보를 해줬으면 대비를 했을 것인데 사전 연락 한마디도 없었다. 상인들과 군청을 찾아가 항의할 예정”이라고 지적했다.

김민호 구례군청 홍보팀장은 “우리도 수자원공사에서 어제 오전에 일방적으로 수문을 개방한다고 통보를 받았다.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복구와 지원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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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저녁 8시30분께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성덕마을 인근 야산이 무너져 주택 일부가 토사에 묻혀 있다. 이 사고로 5명이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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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에서는 폭우로 산사태가 일어나며 5명이 숨져 이웃 주민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지난 7일 저녁 8시30분께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성덕마을 인근 산에서 토사가 마을을 덮치며 주택 세동이 흙에 파묻혔고 바로 옆에 있던 두동은 20m가량 밀려났다. 이 사고로 윤아무개(53)·이아무개(60) 이장 부부를 비롯해 3년 전 귀촌했던 강아무개(73)·이아무개(73)씨 부부, 김아무개(71·여)씨 등 5명이 숨졌다. 나머지 마을 주민들은 오산초등학교 강당으로 긴급 대피해 화를 면했다.

오산초등학교에서 만난 전삼자(66)씨는 “집에서 저녁 연속극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쇠가 찢어지는 큰 소리가 나더라. 깜짝 놀라 신발을 챙길 겨를도 없이 몸만 간신히 빠져나왔다. 이장네 부부는 7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평소 마을 일을 잘 돕고 주민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변을 당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구례 곡성/글·사진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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