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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마크롱 향해… "우릴 통치해달라" 애원한 레바논 국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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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식민 통치했던 프랑스에 "다시 맡아달라" 6만여명 청원

지난 4일(현지 시각) 발생한 베이루트 항구 대규모 폭발 사고로 절망에 빠진 레바논에서 "프랑스가 다시 통치해달라"는 전례 없는 요구가 국민 사이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부패·무능으로 점철된 집권 세력보다 차라리 외부 통치가 낫다는 주장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는 1920년부터 23년간 레바논을 식민지로 삼았고, 이후 레바논은 프랑스의 언어·문화를 유지하며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아왔다. 식민 통치를 했던 나라를 향해 "다시 한번 나라를 맡아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6일 일간 르피가로에 따르면, 5일 오후 국제 온라인 청원 사이트 '아바즈'에 '프랑스가 향후 10년간 레바논을 통치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7일 오후 서명인이 6만명을 돌파했다. 이들은 "레바논은 국가 운영에 완전히 실패했다"며 "부패, 테러를 몰아내고 깨끗하고 견실한 지배 체제를 갖출 때까지 다시 프랑스 지배하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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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 폭발 사고 현장 찾은 마크롱 佛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가운데 손 든 사람) 프랑스 대통령이 6일(현지 시각)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를 방문해 레바논 군 관계자 등과 함께 대형 폭발 사고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프랑스는 1920년부터 23년간 레바논을 식민 통치했고, 이후에도 경제적 지원을 하고 있다. 마크롱을 만난 한 레바논 여성은 마크롱의 손을 잡고 “제발 우리를 도와주세요”라고 했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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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6일 베이루트에 도착하자 레바논인들은 마치 '구세주'가 나타난 것처럼 대했다. 수백 명의 시위대가 마크롱을 에워싸고 "혁명" "정권 퇴진"을 외쳤다. 마크롱에게 레바논 집권 세력을 몰아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한 여성이 마크롱의 손을 잡고 "제발 우리를 도와주세요"라고 절규하자, 마크롱은 "당신이 왜 이러는 줄 안다"며 이 여성을 껴안았다. 주변의 시위대가 일제히 박수를 쳤다.

폭발 현장에서는 한 구조대원이 마크롱에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레바논은 당신 자식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마크롱이 "당신들이 더 이상 추락하지 않게 하겠다"고 했다. 마크롱은 "부패한 자들을 거치지 않고 프랑스는 레바논 국민에게 직접 원조를 할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통치가 더 낫다는 주장이 나올 만큼 레바논은 총체적인 국정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 인구 685만명의 레바논은 작년부터 가속화된 경제난으로 180만명의 노동 인력 중 90만명이 일자리가 없는 상태라고 현지 경제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다. 실질 실업률이 50%라는 것이다. 화폐 가치가 추락해 지난 5월 물가 상승률이 56.5%에 달할 정도로 고통을 겪고 있다. 작년에 이미 -5.6%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레바논은 올해는 코로나 사태가 겹쳐 -12%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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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폭발 사고로 3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해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번 폭발로 항만의 곡물창고가 소실되는 바람에 보관 중이던 대량의 밀이 모두 타버렸다. 현지 언론은 극심한 식량난에 봉착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6일 저녁 베이루트 시내에서는 국회의사당에 돌을 던지는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레바논의 혼란은 종교 대립이 씨앗이다. 이슬람교 양대 종파인 시아파와 수니파가 섞여 있고, 중동식 기독교인 마론파 세력도 상당하다. 종교 간 갈등이 첨예하기 때문에 1943년 프랑스에서 독립할 때 신사협정을 맺었다.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 출신이 나눠 맡는 원칙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다툼을 막기 위해 권력을 종파들끼리 분점했지만 이는 오히려 부패·무능·갈등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도적인 통치 세력 없이 갈가리 찢겨 있었기 때문에 무책임한 국정 운영이 이어졌다. 특히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막지 못했다.

안팎으로 전쟁도 그치지 않았다. 2차대전 이후 숫자가 늘어난 무슬림이 마론파 기독교도들과 충돌해 1975년부터 1990년까지 내전(內戰)을 겪었다. 15년간 약 20만명이 숨졌다. 2005년 이후로는 시아파 강경 무장세력인 헤즈볼라가 여권의 일원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 레바논은 '중동의 화약고'가 됐다. 밖으로는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군과 교전을 계속해 안보 불안이 커졌고, 안으로는 헤즈볼라와 다른 종파 간 대립이 극심해졌다.

이번 폭발 사고 사망자는 6일까지 157명으로 확인됐고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부상자는 5000명이 넘는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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