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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5조원 손실에도 주가는 올라…아이거판 '디즈니만이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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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증권거래소에 지난해 11월 미키마우스와 함께 등장한 디즈니 로버트 아이거 당시 CEO.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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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닝 쇼크'에도 주가는 올랐다. 손실이 한두 푼도 아니다. 47억 달러(약 5조6000억원)나 된다. 그런데도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곳은 월트 디즈니다.

디즈니는 4일(현지시간) 올해 회계연도 3분기(3~6월) 손실이 47억2000만 달러라고 발표했다. 매출도 1년 전보다 42% 줄어든 118억 달러로 집계됐다. 이번 회계연도는 6월 27일 종료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피해가 최고조에 달했던 때다. 2001년 이후 19년만의 첫 적자다.

막대한 적자를 냈지만 주가는 올랐다. 전날보다 0.81% 오른 117.29달러에 장을 마감했다. 마감 후 시간 외 거래에선 더 올라 한때 122달러대를 찍기도 했다. 코로나19로 주가가 85달러 선까지 추락했던 지난 3월에 비교하면 인상적 반등이다.

디즈니의 구원투수는 스트리밍 서비스인 디즈니+(플러스)다. 지난해 11월 서비스를 개시하자마자 구독자 1000만명을 기록하더니 최근엔 1억명으로 10배로 늘었다. 넷플릭스를 위협하는 OTT(Over the Topㆍ인터넷 스트리밍)의 새로운 강자다. 로버트 아이거 회장의 역작이다. 아이거는 2005년부터 최고경영자(CEO)를 맡아 디즈니를 종합 콘텐트 제작 기업으로 키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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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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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실적 발표엔 아이거 회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장고 끝에 지난 2월 후계자로 낙점한 밥 채펙 신임 CEO에게 바통을 넘겼기 때문이다. 채펙 CEO에게 이번 실적 발표는 디즈니 왕국의 새로운 일인자로의 데뷔 무대나 마찬가지였다. 굵직한 발표가 줄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코로나19로 개봉이 미뤄진 영화 ‘뮬란’을 극장이 아닌 디즈니+에서 먼저 공개한다는 계획이다.

올해 초 개봉할 예정이던 ‘뮬란’은 대박을 노릴 수 있는 기대작이었다. 극장 티켓 수익은 물론 굿즈 판매에서도 큰 수익을 안겨줄 것으로 예상됐다. 디즈니가 스트리밍이 아닌 극장 개봉을 위해 공개 일정을 계속 미뤄온 까닭이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세가 미국에서 좀처럼 잡히지 않으면서 디즈니+ 공개로 방향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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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디즈니+, HBO맥스 등이 치열하게 경쟁 중인 미국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시장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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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정을 발표한 인물은 채펙이지만 아이거의 그림자가 짙다. 디즈니+는 아이거의 산물이라는 인상이 강해서다.

아이거는 자신의 저서 『디즈니만이 하는 것』에서 “디즈니의 미래는 3가지 우선순위에 달려 있다”고 적었다. 고품격 브랜드 콘텐트를 만들고, 기술에 대해 투자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아이거 회장은 또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을 리더십 비결로 꼽기도 했다. 그에겐 디즈니+가 새로운 변화로, 고품격 콘텐트로 글로벌 시장을 이끌 수 있는 신기술이었던 셈이다.

포브스는 4일 “디즈니+는 올해 안으로 세계 10대 경제 대국 중 9개국에서 서비스를 오픈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앞으로의 성장에 청신호가 켜졌고, 주가도 이에 반응해 오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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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CEO인 밥 채펙.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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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거 회장과 채펙 CEO를 두고 디즈니 임직원들은 “두 명의 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이거 회장의 이름이 ‘로버트’이지만 줄여서 ‘밥’이라고 불리는 걸 선호해서다. CNN은 채펙 CEO 지명 후 “새로운 밥과 이전의 밥의 공통점이 이름 이상이기를 바라는 게 투자자들의 심정”이라고 전했다. 아이거 회장이 물러나는 것 자체가 디즈니에 악재로 받아들여지며, 당일 주가는 3.6% 떨어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20일 디즈니를 집중 조명한 기사에서 “아이거의 사임 자체가 디즈니 투자자에겐 큰 위험 요소”라며 “아이거만큼 큰 규모의 거래를 계속 성사시켜온 스타 CEO는 드물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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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왕국' 시리즈의 인기 캐릭터 올라프와 스벤(왼쪽). 디즈니의 인기작이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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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거 회장의 시작은 미약했다. ABC 방송의 기상캐스터실에서 근무를 시작한 그는 처음엔 보조 역할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선배 기상캐스터가 펑크를 낸 날, 미리 대본을 외워두고 준비를 해 둔 아이거가 대신 출연을 했다. 이후 그는 승승장구했고, 41세에 ABC 사장이 됐다. ABC가 1996년 디즈니에 인수 합병된 뒤 2005년부터 디즈니 CEO를 역임했다.

그의 진두지휘 아래 디즈니는 애니메이션 회사인 픽사와 ‘스타워즈’의 루카스필름, ‘어벤저스’ 시리즈의 마블 등을 인수했다. 미키마우스와 디즈니월드가 매출의 압도적 비율을 차지했던 디즈니가 영역을 대폭 확장하고 생태계를 구축한 것이다. 아이거는 책에서 이를 “디즈니 은하계”라고 불렀다.

아이거가 늘 성공만 거둔 건 아니다. 책에서도 고백했지만, 불안 발작을 겪었을 때도 있었다. 최근엔 신사업으로 크루즈에 손을 댔다가 쓴맛도 봤다. 크루즈선이 코로나19의 온상이 될 줄은 아이거 회장도 미처 예상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거 회장은 실패 상황에서도 덤덤히 털고 일어나 새로운 돌파구를 디즈니+에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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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가 운영했다가 실패했던 크루즈선. 선박 빨간 굴뚝에 미키마우스 로고가 보인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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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이거의 앞에 놓인 최대의 과제는 후임자인 채펙 CEO의 연착륙이다. 그는 책에서 “어떤 조직에서든 한 사람이 너무 오래 권력을 잡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비판을 수용하는 노력을 의식적이고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적었다.

채펙에 대해 아이거는 “소비자 제품과 테마파크 운영에 크게 기여했다”며 “상하이 디즈니랜드 개장의 일등공신”이라고 평했다. 앞으로 디즈니가 중국 시장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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