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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신문물에 행복해했던 그 시절…‘조개표’ 광고 속 미소는 어디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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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의 과거창]

석유문명 혜택 강조한 1970년대 광고

전기기관차-한복으로 극적 대비 노려

기후위기 부른 20세기의 박제 보는 듯


한겨레

1974년 한 월간지에 실린 석유회사의 광고. 서울SF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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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74년 초 한 잡지에 실린 광고. 이 한 장의 그림에는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여러 이야기며 맥락들이 담겨 있다. 먼저 ‘조개표’라는 말에 주목해보자. 지금은 생소하지만 ‘조개표 석유’는 우리나라에서 반세기 넘게 널리 쓰이던 유명한 상표 이름이었다.

구한말 이후는 석유의 수요가 창출된 시기였다. 자동차와 기차 등은 물론이고 조명이나 난방용으로도 널리 쓰였다. 내연기관의 경우 연료뿐만 아니라 윤활유도 필요했다. 또한 전기 모터도 윤활유를 썼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는 산유국이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이 모든 석유는 수입해야 했다.

‘조개표’는 1920년대에 한반도에 들어온 로열 더치 쉘의 석유 상표였다. 로열 더치 쉘은 네덜란드와 영국이 합자한 세계적인 에너지기업으로 지금도 건재하며, 석유와 천연가스 등을 주로 취급한다. 1920년대 당시엔 일본 회사를 통해 수입되었는데 가리비 조개 모양의 상표와 조개표라는 명칭을 내세워 인지도가 쌓였다. 조개(shell)를 회사 이름과 상표로 쓴 이유는 원래 이 회사의 영국 쪽 기원이었던 사업체가 아시아에서 조개를 모아서 장식용으로 유럽에 판매했던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로열 더치 쉘의 조개표 석유 외에도 미국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솔표 석유가 있었다. 스탠다드는 일찍이 1897년에 우리나라에 저유소를 지어 한반도의 초창기 석유유통업에서 시장을 사실상 독점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국 석유시장도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스탠다드 석유회사는 1911년에 미국 정부의 반독점법에 의해 해체되어 34개 회사로 분할되었다. 오늘날 세계 석유업계에서 로열 더치 쉘을 앞선 최대 기업으로 군림하고 있는 엑슨 모빌도 그 당시 분할된 34개 회사들 중 일부가 합쳐져서 성장한 것이다.

로열 더치 쉘은 1960년대에 창립된 극동정유에 지분을 투자하는 형식으로 다시 한국에 진출하였다. 여전히 남아 있던 ‘조개표’ 명성이 브랜드 인지도에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이 광고에서도 그런 점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광고에서 더 주목을 끄는 것은 바로 한복을 입은 노인과 전기기관차를 대비시킨 구도이다. 전근대와 근대를 상징하는 이 대비에서 활짝 웃는 노인의 모습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서양에서 넘어온 신문물이 전근대적인 우리나라의 생활상을 일신시켜서 그 혜택을 경험한 노년 세대가 행복한 감탄의 표정을 짓는다.’ 이것이 70년대까지도 종종 볼 수 있었던 기업 광고의 콘셉트였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 보면 이건 20세기에나 유효한 서사이다. 21세기는 환경오염이나 기후위기 등을 야기하는 에너지산업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반드시 필요한 시대이다. 과연 기존의 거대에너지 기업들은 얼마나 그런 노력을 쏟고 있을까. 전근대의 노인이 아닌 미래 세대의 아이들이 활짝 웃는 모습은 이미 그들의 광고에 등장한 지 꽤 되었지만, 그 아이들이 노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미소가 남아 있을까? 역사의 한 시절을 박제한 듯한 광고를 보면서 드는 단상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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