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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2년 더 살겠다" 세입자 문자통보…울화통 터지는 집주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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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617규제소급적용 피해자모임, 임대사업자협회 추인위원회 등 부동산 관련 단체 회원들이 1일 서울 여의도에서 정부의 부동산 규제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임대차 3법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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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에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는 1주택자 한 모(46) 씨는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다. 한 씨는 지난달 1일 세입자에게 전세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알리고 지난달 29일 매매 계약을 체결했다. 잔금은 전세 계약이 끝나는 다음 달 9일로 정했고, 실거주할 계획인 매수자는 현재 사는 집을 잔금 지급 날짜에 맞춰서 팔았다.

그런데 지난 2일 세입자가 “임대차법 시행으로 나에게 계약갱신요구권이 생겼다. 2년 더 살겠다”고 한 씨에게 연락했다. 한 씨는 “새 집주인이 실거주하는 경우는 계약갱신요구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설명해도 막무가내다. ‘날 내보내고 싶으면 손해배상을 하던지 명도 소송을 하라’고 한다”고 말했다.

세입자가 ‘버티기’를 하면 한 씨의 손해는 크다. 명도 소송을 해도 실제로 세입자를 내보내기까지 6개월은 걸린다. 이의 제기나 송달 문제 같은 변수가 생기면 1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매수자 입장에선 그 기간 살 곳이 없다. 계약을 파기하려면 한 씨는 계약금만큼 배상금을 물어줘야 한다. 한 씨는 “자칫 집도 못 팔고 계약금(9000만원)에 해당하는 배상금만 날릴 판”이라며 “세입자가 이런 상황을 노리고 금전을 요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흑석동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성 모(59) 씨는 지난달 초 집을 팔기 위해 부동산 중개업소에 매물로 내놨다. 오는 10월 전세계약이 만료되는 세입자에게는 지난 6월에 미리 “은퇴 후 귀촌할 계획이라 집을 팔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지난 3일 중개업소 소장에게 연락이 왔다.

세입자가 집을 보여주지 않아서 매매 중개를 진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씨는 “세입자가 ‘임대차법 시행된 거 알 거다. 2년 더 살겠다’는 문자만 남기고는 전화도 받지 않는다”며 “주인이 바뀌어도 계약갱신요구권을 쓰면 되는데 연락도 안 되고 집도 보여주지 않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집주인 vs 세입자, 총성 없는 전쟁터로



전‧월세 시장이 집주인과 세입자 간 전쟁터로 변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임대차 3법’ 중 계약갱신청구권(2+2년)과 전‧월세 상한제(5%)가 도입되면서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관련 법안이 상정되고 본회의를 통과한 뒤 시행까지 걸린 시간은 이틀에 불과했다.

'진격의 속전속결 입법'으로 인해 충분한 논의나 정보 공개가 이뤄지지 않은 탓에 현장의 혼란이 커지고 있다. 총성만 울리지 않을 뿐 집주인과 세입자의 분쟁과 갈등은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강화된 세입자 권리에 맞서기 위해 집주인은 전세대출 동의 거부, 엄격한 원상복구 의무 요구, 세입자 면접 등 규제 틈새를 찾아 나섰다. 임대차법을 악용하는 세입자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흑석동 중개업소 관계자는 “집주인이 들어온다는 데도 억지를 부리며 버티기를 하거나 팔려고 내놨다는데 집을 보여주지 않는 식”이라며 “집주인에게 이사비라도 받아보겠다는 심보”라고 말했다.

임대차법 시행 전에 재계약했지만, 법대로 전세보증금을 낮춰서 다시 계약하기도 한다. 계약만료일이 법 시행 이후라면 올린 전셋값을 조정할 수 있어서다. 예컨대 계약만료가 다음 달인데 지난달 5억원인 전셋값을 1억원(20%) 올리는 재계약을 맺었다면 세입자는 계약갱신요구권을 지난달 재계약에 적용해 전셋값 인상분을 2500만원(5%)으로 낮출 수 있다.

모든 세입자가 웃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희비가 엇갈린다. 계약 만료가 9월 이후인 세입자는 표정 관리 중이다. 이들을 제외한 신규 세입자는 그야말로 제대로 한 방 맞은 상황이다. 전셋값이 오른 데다 전세물건이 귀해져서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 아파트 전세 거래는 6304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만196건)보다 38% 줄었다. 9년 만에 가장 적다.

이처럼 전세 품귀 현상이 빚어지는 것은 세입자와의 소모전을 피하려는 임대인의 움직임의 영향도 있다. 집주인(직계 존‧비속 포함)이 직접 거주하거나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셋값 비율)이 낮은 지역은 아예 집을 비워두기도 한다. 세입자를 내보내고 새 세입자를 들이면 기존 세입자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하지만, 집을 비워두는 경우는 해당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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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세입자, “주거 비용만 늘었다”



집주인이 세입자를 두는 대신 공실을 선택하면서 주거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하지만, 주거 비용이 낮았던 전세 매물도 시장에서 사라지고 있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개포주공6단지 53㎡형 매매가격은 17억원 선인데 전셋값은 4억원 선이다. 주거여건이 열악한 재개발 지역은 전세가율이 더 낮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26㎡ 빌라는 매매가격이 10억원이지만, 전셋값은 6000만원이다. 이 빌라 소유자인 곽 씨는 “법이 너무 복잡하고 성가신 데다 저금리라 돈 굴릴 곳도 없어서 그냥 집을 비워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마땅한 전셋집을 구하지 못한 신규 세입자는 결국 반전세(전세+월세)나 월세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주거비용 부담이 확 늘어난다. 2년 전 5억5000만원을 주고 서울 송파구 가락동 헬리오시티 84㎡(이하 전용면적)에 전셋집을 얻은 유 모(43) 씨는 10월 전세 계약 만료 때 퇴거해야 한다. 집주인의 아들이 거주하겠다고 해서다. 유 씨는 중학교 3학년인 자녀가 있어 지역 이동이 쉽지 않다.

현재 이 아파트 전셋값은 10억원으로, 유 씨의 계약 만료일에 맞추려면 5억원에 160만원인 반전세를 얻어야 한다. 유 씨는 “차라리 그냥 전셋값 4억5000만원을 올려줬으면 전세자금대출 이자 90만원 정도를 내면 되는데 꼼짝없이 월 160만원을 내게 생겼다”고 토로했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다양한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고 급하게 법을 만든 탓에 당분간 시장의 혼선은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현주 기자 chj8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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