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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부부 건축가의 세상짓기] 보이지 않는 집, 기록의 건축 / 노은주·임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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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노은주·임형남 ㅣ 가온건축 공동대표

건축은 기록이다. 그 안에서 사람은 흔적을 남기고 기억을 담는다. 많은 집들이 그렇듯, 우리도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 벽에 세워놓고 키를 재어 눈금을 긋고 날짜를 적었다. 아이들의 성장과 함께 집에 생기는 나이테를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는데,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되며 그 기록을 가져갈 수 없어 안타까웠던 적이 있다.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 어떤 형태로건 자취를 남기는 일인데, 유목민처럼 떠도는 현대인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럴 때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이고 그 안에서 살아간 사람이 남기는 기록의 저장소이다.

예전에는 집을 지을 때 구체적인 기록을 남겼었다. 집의 뼈대를 다 세우고 마지막으로 마룻대(종도리)를 얹을 때, 상량식이라는 의식을 하며 아래에서 올려다볼 수 있는 마룻대 배 부분에 ‘상량문’을 적어 넣는다. 불과 물로부터 집을 지켜주는 용(龍)과 구(龜)를 쓰고, 그 사이에 언제 상량을 했는지와 주인의 신상을 기록한다. 등 부분에는 공사비 내역 등의 자세한 정보와 집의 안녕을 기원하는 문장을 적어서 얹어놓는다. 나중에 집을 고칠 때 쓰라고 약간의 돈을 집어넣기도 하는데, 마룻대를 들출 정도면 무척 큰 공사가 되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우리는 오랜 후에도 문제를 고치는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사실 우리는 무척 열심히 기록을 남기는 민족이다. <조선왕조실록>만 해도, 임금의 한마디 한마디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당시 일어난 굵직한 나라의 일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만약을 대비해서 네 군데의 사고(史庫)를 만들어 보관했으니 그 치밀함과 정성이 정말 대단했다. 손으로 기록하고 그 기록물을 잘 보관하고 전해주는 일은 그만큼 중요했다.

그러나 이제 기록들은 보이지 않는 형태로 보존된다. 살아가며 쌓이고 있는 우리의 ‘데이터’들은 이제 공중을 날아다닌다. 사진이든 글이든 전파의 형태로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어딘가로 저장된다. 처음에는 휴대폰이나 컴퓨터에 메모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포털의 드라이브에 두었다가 편리하게 꺼내 보거나 출력할 수 있다. 당장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 ‘데이터센터’를 지은 구글이나 아마존, 네이버 등의 거대 기업들이 실제로 우리의 기록들을 대신 보관해주는 덕분이다.

삶의 기억과 추억은 우리 집 선반에 있던 시대를 지나, 존재조차 잘 모르는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가 소환되곤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건축도 어느 날 문득 형태를 감추고 공중에 떠 있다가 우리가 부르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진정되지 않는 부동산 가격으로 한껏 예민해진 사람들을 보면서 어쩌면 이미 사라진 ‘기록으로서의 건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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