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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이봉현의 저널리즘책무실] 늦더라도 괜찮은 기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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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0일 오전 서울시청에서 한 관계자가 박원순 시장의 유고 소식이 담긴 신문을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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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봉현

저널리즘책무실장

(언론학 박사)

좋은 기사의 미덕은 빠르고 정확한 것이다. 그러기 어렵다면, 하루 늦더라도 사실과 맥락을 차분히 짚어주는 길을 택해야 할 때가 있다. 9일 저녁부터 박원순 서울시장의 실종과 죽음을 다룬 <한겨레> 보도에서도 이 점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있었다.

박 시장이 주검으로 발견된 것은 10일 0시1분. 이날 아침 한겨레는 그가 숨진 채 발견됐다는 소식과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상태였다는 점을 알리며, 죽음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권 강조해오다 ‘도덕성 치명타’…수습 힘들다 판단한 듯’(2면). 이 기사는 종이신문 마감 뒤에 제작돼, 별도의 구독자에게만 제공하는 피디에프판으로 발행됐다. 하지만 이날 새벽부터 아침까지 누리집과 모바일 화면에 메인 기사로도 걸려 누구나 읽을 수 있었다.

이 기사에 전화와 댓글로 불쾌감과 불만을 표시하는 독자가 여럿 있었다. 박 시장의 죽음과 성추행 혐의 피소를 성급히 연관 지었다는 게 항의의 요지였다. 한 독자는 “사실관계가 밝혀진 것도 아닌데 추측성 기사는 쓰지 말았으면 합니다”라고 썼다. 또 다른 독자는 “피고소인의 자살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의 증거가 되느냐”고 물었다. 이런 지적을 반영해, 한겨레는 오전 9시 무렵 온라인 기사의 내용을 덜어내고, 제목도 대폭 수정했다.

이후 며칠간 박 시장 죽음의 원인이 성추행 피소 때문임을 전제한 보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박 시장이 조금 전 주검으로 발견됐고, 많은 것이 불확실하던 시점에 내보내는 기사는 저널리즘 원칙을 따져 신중히 다뤄야 했다.

기사의 크고 작은 제목에 쓰인 ‘인권 강조해오다 ‘도덕성 치명타’’, ‘정작 본인은 성인지 감수성에 둔감’ 같은 표현은 혐의 내용이 확정적이란 인상을 줄 수 있었다. 박 시장이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점에 고소의 내용까지 확인해 준 사람은 없었다. 기사는 또 박 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단정하고, 그 이유를 “~듯”, “보인다” 같은 추정의 언어로 설명했다. ‘수습 힘들다 판단한 듯’, ‘사회적 지탄 압박 견디지 못한 듯’, ‘여론과 법의 심판을 받는 대신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 등이 그런 표현이다. 다른 기사에 보면 경찰이 “아직까지 타살 혐의점은 없다”고 한 말을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유서의 존재조차 모호하던 상황에서 그가 무언가에 몰려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 본 것은 성급했다.

물론, 의욕적으로 일하던 박 시장이 갑자기 잠적해 주검으로 발견되기까지, 전날 있었던 고소가 영향을 줬으리란 것은 상식적인 추정이다. 비록 ‘~ 전해졌다’라는 불투명한 서술어로 작성됐지만, 박 시장의 측근들이 고소 사실이 확인된 8일 밤 대책회의를 했고, 이 자리에서는 사임 얘기까지 나왔다는 추가 정보도 한겨레 기사에 있다. 하지만 충분한 판단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내리는 원인 추정은 죽음의 이유를 오도하고, 특정인에게 죽음을 초래했다는 죄책감을 줄 위험이 있다. 한국기자협회의 ‘자살보도권고기준 3.0’은 “자살은 단순화하기 어려운 복잡한 요인으로 유발된다. 따라서 표면적인 자살 동기만을 보도할 경우 결과적으로 잘못된 보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히고 있다. 독자의 긍금증 해소가 중요했다면 피소 사실을 별도의 기사로 처리해 독자가 짐작하게 하거나, 기사에 넣더라도 “죽음과의 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덧붙이는 게 그 시점에서는 나았을 것이다.

한겨레는 이 사건 초기부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걱정하고, 누구도 아프지 않게 고인을 추모하자는 쪽으로 보도의 가닥을 잡아왔다. 그런 배려의 마음이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접한 뒤 당혹하고 낙담할 독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도 발휘되면 좋았을 것이다. 박 시장의 혐의가 사실이라 해도, 밤새 산속에서 번민하다 다음날 내려와주길 기원하며 잠이 들었을 독자가 많았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기사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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