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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아침햇발] 애도는 무엇으로 애도인가 / 안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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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11일 오후 서울시청 앞에 마련된 고 박원순 서울시장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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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춘 ㅣ 논설위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한 당의 대응을 묻는 기자에게 “××자식”이라고 한 것은 그저 욕설로만 들리지 않는다. 문제의 표현은 특정한 출신 배경을 가진 이에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표지를 붙인 데 연원을 두고 있다. 이 대표는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질문자의 자격을 따졌고, 그 자리가 박 시장의 빈소였던 맥락까지 고려하면 ‘애도자로서의 자격’을 따졌던 셈이다. 그의 욕설을 순화해 재구성하면 “당신은 애도자로서 자격 미달입니다”쯤 되지 않을까.

빈소에서 기자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논쟁적일 수 있다. ‘굳이 그 자리여야 했을까’라고 물으면 여러 논거로 찬반이 갈릴 것이다. 한국기자협회가 이 대표의 직접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을 낸 것은 개중 가장 기자 본위적인 반응이었다. 기자협회는 “취재 장소가 질문 내용엔 다소 부적절한 곳일 수도 있지만, 기자가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서까지 질문하는 이유는 진영이나 이념의 논리가 아닌 진실을 보도할 책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기레기’라는 표현이 ‘기자’를 대체한 지 오래다 보니 듣기에 멋쩍다.

이 대표의 욕설을 문제 삼는 것보다 그 질문을 이 대표에게 돌려주는 게 낫다고 나는 본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 조중동은 “오로지 슬퍼하기만 하라”고 요구했다. “그 이상의 정치적 문제 제기는 고인을 욕되게 할 뿐”이라고 을렀다. 그러나 애도를 철저히 탈정치화하려는 저들에게 우리는 “애도를 참칭하지 말라”고 준열히 경고했다. 모든 죽음에 정치적 메시지가 있듯이 모든 애도에도, 좋든 나쁘든, 정치적 메시지가 있다. 이 대표를 비롯해 우리 모두는 애도의 정치성을 의식하지 않으면 애도자로서 충분한 자격이 없다.

롤랑 바르트는 <애도 일기>에서 “애도는 고통스러운 마음의 대기 상태”라고 했다. “극도의 긴장 상태”라고도 했다. 애초 이 글은 고 박원순 시장을 주어로 세워서는 쓸 수 없었다. 내가 공동체를 위한 헌신에서 그보다 턱없이 모자라서이기도 하지만, 그런 그가 철저히 자기 본위적인 죽음으로 건너간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같은 이유로 피해 호소인을 주어로 세울 수도 없었다. 실체적 진실을 성인지적으로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과 그가 겪고 있을 고통에 몰입하지 못하는 마음이 긴장의 대기 상태로 팽팽했다.

결국 주어는 나 자신일 수밖에 없고, 나는 ‘머뭇거림’의 주체다. 머뭇거림이 얼마나 진정한 정치적 애도가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글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쓴 ‘노무현 ‘동지’를 꿈꾸며…’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를 하던 시절 별처럼 많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그는 비보를 듣고 부산역 광장 빈소 근처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튿날 다시 한번 찾아가 광장을 빙빙 돌다 마침내 조문을 한 뒤 방명록에 이런 글을 남겼다.

“오랜 세월 동지였고 짧은 시간 적이었습니다. 변호사 접견 오셨을 때처럼 봉하마을 어딘가에 앉아 각자의 위치가 만들어낸 그동안의 원망과 미움들을 두런두런 털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곧…. 고맙고 죄송합니다.”

김 지도위원은 방명록에 쓰지 못한 회한을 다시 긴 글로 풀었다. 노무현 변호사가 정치권으로 간 뒤에 ‘공돌이 공순이의 유일한 빽’을 잃었고 그가 ‘이제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겠구나’ 직감했다는 얘기며, ‘당신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잘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다’는 탄식을 거친 뒤, 그는 다음과 같이 고인에게 말을 건넨다.

“다음 생에 오실 땐, 너무 똑똑하게 오지 마시구려. 사법시험도 합격하지 마시고요. 그냥 태생대로 기름밥 먹는 노동자로 만났으면 해요. (…) 떠날 일도 보낼 일도 없이 그냥 내내 동지로.”

노무현의 죽음과 박원순의 죽음은 동렬에 설 수 없다. 다만 나는 ‘애도는 무엇으로 애도인지’ 나에게 묻고자 한다. 머뭇거림은 추억을 환상화하지 않으면서 애도를 진실 추구의 과정으로 밀고 가는 여러 힘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산 자들이 제 마음 편하자고 고인을 상징화하면서 정작 타자화하고 있지 않은지도 돌아볼 일이다. 애도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이제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른다.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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