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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122] 망가진 생일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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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생일 케이크

휜 것은 슬프다

바나나와
못과 반지

배수관과 철길

새우의 허리와
눈송이의 산란한 낙하와
옷걸이의 모서리까지 치자면

늘어진 것이 아닌
휜 것들의 우아함은
죄의 방향을 닮았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소란들을 다 담으려는 듯
부풀어 오르고 점점 휘어지는
어느 근원을 향해 차려진
아주 오래된 광기

―이병률(1967~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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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난 햇대[竹]에 잎이 돋아 늠름해졌습니다. 비 온 아침에 보니 제 허리에 닿기까지 휘어졌습니다. 하나 무겁디무겁던 이파리들이 마르고 나면 언제 그랬나 싶게 다시 치솟아 하늘 속에 꼿꼿합니다. 타고난 탄성 때문입니다. 곧은 자세는 끝내 곧은 자세가 됩니다.

여기 '휜 것'에 대한 여럿의 상념이 있습니다. 한번 휘면 못 쓰는 '못과 반지'가 있으며 휘어져 굳어버린 '새우의 허리'는 슬픕니다.

'휜 것들의 우아함'에서 끝내 '죄의 방향'을 읽어냅니다. 때로 둥글게 휘어져서 '우아한 것'은 물질의 그것이지만 정신은 '죄의 방향'과 닮았습니다. 그 예증의 이미지를 이어서 불러옵니다. 욕망의 크림으로 부풀려져 우아한 파티용 '생일 케이크'가 있습니다. '부풀어 오르고 점점 휘어'집니다. 곧 '망가'질 차례입니다. '근원을 향'한, 사색이 아닌, '차려진' 것이니 '오래된 광기'라는 해석입니다. 시가 이토록 실용적인 '발견'일 때 서늘합니다.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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