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성공 뒤에는 평양 진군의 선봉에 섰다. 중공군의 기습으로 후퇴해 38선에서 교착상태가 이어질 때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을 이끌어 적의 후방교란을 차단했다. 6·25전쟁의 결정적 국면마다 백 장군이 있었다.
백 장군은 남다른 군 지휘능력과 영어 실력으로 한미연합작전의 빼놓을 수 없는 한국 측 주역이었다. 그는 전공(戰功)을 인정받아 6·25전쟁 중 32세의 나이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고 이듬해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군사장비도 전투 경험도 부족한 한국군을 우습게 취급하던 미군도 백 장군의 실력과 용기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에게 한미방위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설득한 것도 그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은 한국에 부임하면 백 장군을 찾아 인사하는 것을 지금까지도 관례로 삼아왔다. 한미군사동맹의 상징 같은 인물이 떠났다.
존경받는 노장(老將)으로 늙어가던 그를 뒤늦게 ‘친일파’라고 낙인찍고 나온 것은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다. 일제강점기 만주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면서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1930년대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작전으로 백 장군이 부임한 1943년 무렵에는 간도에 있던 독립군은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뒤였다. 당시 간도특설대가 상대한 것은 주로 중국공산당 팔로군이었다고 한다.
여권 일각과 좌파성향 단체들은 백 장군의 서울현충원 안장은 물론이고 대전현충원 안장마저 거부하고 있다. 보훈처는 서울현충원이 포화상태라는 이유로 백 장군의 대전현충원 안장을 결정했다. 백 장군은 생전에 논란을 만들고 싶지 않다며 대전현충원 안장 결정을 받아들임으로써 장군의 품격이 어떤 것인지 보여줬다. 하지만 6·25전쟁 전사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서울현충원의 상징성을 감안하면 백 장군은 가능한 방법을 찾아내 서울현충원에 모셔야 한다. 당장 안 된다면 차후에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우리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준 전쟁 영웅에 합당한 예우다.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