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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길을 잃어라[내가 만난 名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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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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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수 일본어 번역가


‘길을 잃어라. 강제된 실수와 적당한 불안이 최고의 안내원이다.’ ―안드레 애치먼 ‘알리바이’ 중

그날 나는 시차 때문에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밖으로 나가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피렌체 대성당이 나왔다. 전날 성당 사정으로 들어가지 못해 아쉬웠던 터라, 굳게 닫힌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그때 한 노신부님이 다가왔다. 얼른 문을 열어드리며 나도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물론이지!” 하셨다. 곧이어 눈앞에 나타난 광경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 순간 알았다.

사방이 부드러운 적막으로 휩싸인 가운데 돔 꼭대기에서 흘러든 햇빛에 천장화의 인물들이 반사되고 있었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빛 속으로 빨려들 듯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순간을 잡아두기 위해 숨을 참는 것밖에 없었다. 그 장엄하고 영적인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했으므로 나는 후에 그것에 대해 남에게 설명하기를 아예 포기해버렸다.

안드레 애치먼은 ‘알리바이’에서 로마를 여행하며 ‘길을 잃어라’고 썼다. 작가는 ‘몸속 나침반에 절반쯤은 매혹된 채’ ‘로마가 눈앞에서 빙빙 돌도록’ 거리를 돌아다닌다. 요즘은 마음처럼 떠날 수 없으니 아쉬운 대로 구글맵을 켜서 그가 떠돌던 곳을 눈앞에 띄워봤다. 스페인광장, 캄포데피오리, 판테온 신전….

장소를 저장하려다 관뒀다. 언젠가 이탈리아에 다시 갈 수 있다면 나 역시 ‘지도를 무시하고’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트레비 분수를 맞닥뜨리고 싶으니까. 내가 원하는 여행은 ‘거북이 분수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거북이 분수를 예기치 않게 발견하는 것’이며, 그 생경한 감각 속에서 피렌체 대성당과 같은 잊히지 않는 순간을 축적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나는 익숙한 곳을 떠나 ‘다른 곳’에 당도했음을 실감할 것이다. 책 제목 ‘알리바이’는 라틴어로 ‘다른 곳에’라는 뜻이다.

이지수 일본어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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