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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나는 손님 울리는 기사"...  길 위에서 만난 한 권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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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이 가봤다]
택시기사가 건넨 한 권의 노트...
긍정의 기운 퍼트리는 '나비효과'로

출근길에 비뚤비뚤 써내려간 속마음...
위로의 편지가 돼

SNS에서 화제 된 ‘#길위에서쓴편지’...
누리꾼의 마음 울리다


한국일보

명업식 택시기사는 '길 위에서 쓴 편지'를 승객들에게 건네주며 고민이나 하고 싶었던 말 등을 적게 한다. 정준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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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종교 관련된 것 말고 그냥 고민이나 하고 싶었던 말을 허심탄회하게 적어달라고 해요. 그러면 솔직한 글들이 술술 나와요.”

현재 서울 시내를 달리는 택시는 총 7만 1,804대, 택시 기사는 7만 6,864명에 달합니다. 그들은 묵묵히 운전만 하는 경우와 승객과 대화를 하려는 이들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하지만 택시 안에서 대화를 시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을 넘는 말로 불편함을 줄까 걱정도 되고, 편하게 말을 걸고 싶어도 이어폰을 꼽고 스마트폰 만 만지막 거리는 승객 때문에 머쓱해지기 일쑤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어색한 공기만 택시 안을 맴돌 뿐이죠.

그런데 여기 조금 ‘특별한’ 택시가 있다는데요. 작은 노트와 펜으로 소통의 물꼬를 트는 명업식 기사(60)의 택시입니다. 명씨는 승객이 타면 목적지를 네비게이션에 찍은 후 손바닥만 한 노트와 펜을 건넵니다. 노트 제목은 ‘길 위에서 쓴 편지’. 처음 본 기사의 낯선 노트안에 얼마나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을까요?

뜻밖에도 노트를 받아든 이들은 흔들리는 차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꾹꾹 눌러 쓴다고 해요. 비단 한두 명만의 경험담이 아닙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길위에서쓴편지’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노트 사진이 하루에도 수십 건씩 올라오니까요. 승객들은 명씨의 택시가 예기치 않았던 ‘선물’처럼 다가왔다고 말합니다. 명씨의 사연이 퍼지면서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소설 같다. 감동적이다”(미*), “남에겐 별거 아닌 것 같은 얘기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일이라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을 때, 우연히 만난 노트한 권이 승객들에게 큰 힘이 되어준 것 같다”(몇*******)며 응원 글도 달리고 있습니다.

명씨는 어떤 이유에서 이런 소소한 이벤트를 준비하게 됐을까요. 2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창운기업 차고지로 직접 찾아가 명씨를 만나봤습니다.

“사소한 오해 대신 진솔한 대화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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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업식 기사는 지난달 27일부터 네 번째 '길 위에서 쓴 편지'를 시작했다. 정준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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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만 데려다주면 끝인데, 노트가 있으니 대화를 하게 되더라고요. 글을 쓰면서도 잠깐 잠깐 이야기를 나누니까 택시 안 분위기가 훨씬 좋아졌어요.”

‘길 위에서 쓴 편지’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했습니다. 축협중앙회에서 근무하던 명씨는 명예퇴직을 하고 개인 사업을 꾸렸는데요. 상황이 어려워지자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2018년 11월 1일부터 택시 기사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딱 1년이 지났을 때 명씨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에 부딪쳤습니다. 특히 승객과 소통이 어려웠던 점이 가장 힘들게 다가왔습니다. 택시를 타면 승객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소통도 대화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사소한 오해도 자주 생겼다는데요. 택시 요금이 평소보다 200원, 300원 더 나왔다고 불평하거나 길을 일부러 멀리 돌아갔다고 짜증내는 승객들을 볼 때면 마음이 무거웠다고 해요.

그러나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자르자’는 각오로 일단 버티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당시에는 법인택시를 3년 무사고로 운행하면 개인택시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죠. 기왕 버티기로 했으니, 승객과 갈등 없이 달릴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였을 겁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 소통할 방법을 생각해보다가 떠올린 것이 바로 이 노트였습니다. 손님들에게 노트를 주고,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면 어떨까 하는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 건데요. 명씨는 퇴근 뒤 무작정 근처 문구점으로 달려가 노란색 줄노트 한 권과 까만 펜 한 자루를 샀습니다. 승객들이 자신의 속마음을 정말 다 털어놓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생각보다 노트 한 권이 금세 채워졌다고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변 사람 아무도 명씨 수첩의 존재조차 몰랐다고 해요. 승객과 소통을 위한 수단일 뿐이지, 큰 자랑거리는 아니었을 테니까요. 나중에 '길 위에서 쓴 편지'를 알게 된 지인들은 하나같이 "기가 막힌 아이디어다", "택시기사를 그만둬도 나중에 큰 추억이 되겠다"며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승객을 태우면서 상처를 받은 날도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명씨는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노트와 함께요.

노트는 삭막한 택시 안 분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요즘 뭐가 제일 힘드냐’는 택시 기사의 질문이 더 이상 부담스럽지도, 무례하게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승객들은 오히려 더욱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써내려간다고 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미터기 요금이 올라가는데도 “조금 더 쓰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손님도 있습니다. 편지를 쓴 건 승객들인데 명씨에게 감사하다고 한다네요. “팁을 주거나, 햄버거 바꿔 먹는 티켓(기프티콘)을 줄 때도 있어요. 호응이 좋아요.”

승객과 소통하기 위해 시작한 '길 위에서 쓴 편지'가 되려 승객들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 또 위로까지 건넵니다. 조그마한 노트가 따뜻한 마음을 퍼트리는 셈이죠.

서로가 서로의 나비효과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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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업식 기사는 길 위의 심리상담가가 되어 긍정의 에너지를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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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택시 중에 명씨의 택시를 마주친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이름마저도 특이합니다. ‘길 위에서 쓴 편지’라니. 얼핏 문학 작품의 제목 같기도 한 노트의 이름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명씨가 처음 이런 방식을 구상할 때는 미처 제목까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강서구청에서 종로로 가는 승객 두 사람을 태웠던 날 그는 해답을 찾았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들으니 문인 같았다고 해요. 그래서 그들에게 자신의 사연을 털어 놓고 제목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한참 생각하던 한 승객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가 돼서 살며시 제안을 했다는데요.

알고보니 그 승객은 박준 시인이었습니다.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로도 유명한 시인이죠. 박 시인은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자신에게 보내든 누구에게 보내든 편지라고 하면 짧은 시간 안에 진솔한 이야기를 담게 된다. 그래서 노트 제목을 길 위에서 쓰는 편지라고 짓는 게 어떻냐고 했다"고 전했습니다.

만약 명씨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박 시인은 그저 스쳐지나갈 인연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든다’는 명씨의 좌우명처럼 노트에 대한 구상을 차근차근 해왔던 덕분에 근사한 이름의 노트가 탄생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명씨의 색다른 시도는 주변 동료들에게도 영향을 줬습니다. ‘길 위에서 쓴 편지’를 보고 주변 동료 기사들이 따라한 적은 없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명씨는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손님과 소통하기 위해서 여러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한 후배 기사는 편지 대신 ‘약과’를 선택했다고 하는데요. 매일같이 약과를 사서 바쁜 출근길에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한 승객들에게 하나씩 나눠준다고 합니다. 배가 차지 않으면 약과 하나를 더 주고요.

명씨의 노트처럼 후배 기사에게는 약과가 소통의 출발점이 된 겁니다.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한 승객들은 또 얼마나 커다란 행복을 타인에게 안겨 줄까요?

“남 얘기 말고 당신의 이야기를 쓰세요”… 도로 위의 심리 상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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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업식 택시기사의 노트 '길 위에서 쓴 편지'에 글을 썼던 사람들이 SNS에 #길위에서쓴편지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인증샷을 올리고 있다. 'letter_on_the_road' 인스타그램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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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신촌에 사는 15살 중학생이에요. 오늘 이 택시를 타고 아빠 생일 축하 파티를 하러 가요! 아빠는 올해로 만 오십 세가 되셨는데, 아주 동안이세요. 키도 엄청 크고, 다리도 긴 우리 키다리 아버지! 생신 축하드리고 앞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이직할 회사와 계약서 작성 후 집으로 가는 길. 설렘, 두려움도 있지만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나 자신을 다독여 봅니다. 손이 얼어서 글씨는 엉망이지만 택시 안은 따뜻하네요. 2020년은 저에게, 기사님에게, 그리고 이 택시를 이용하시는 모든 분들에게도 좋은 기운을 가져다주기를 희망합니다. 화이팅!"

"아빠 병문안 다녀오는 길에 탄 택시에서 이렇게 편지를 쓰네요. 우리 가족 희망 잃지 않고 열심히 기도할게요. 감사합니다!"

"사실 택시가 버스나 지하철 같은 다른 대중교통과는 다르게 아주 사적인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건데 대중교통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기사님께서 이 노트를 건네주실 때, 그제서야 이 가까운 거리를 실감하게 된 것 같습니다. 말 한 마디, 눈빛만으로도 하루가 행복해질 수 있음을 아시고 이렇게 노트를 건네주신 거죠? 오래간만에 기분 좋은 이동길이 되었습니다. 항상 안전 운행하세요."

이처럼 각각의 사연이 담긴 ‘길 위에서 쓴 편지’는 8개월 만에 세 권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습니다. 지난달 27일부터 네 번째 이야기를 시작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의 감동을 알리기 위해 출판 준비까지 앞두고 있다고 해요.

편지가 이만큼 쌓였으니 기억에 남는 승객도 많을 텐데요. 명씨는 지난달 중순에 태웠던 20대 초반의 여성을 떠올렸습니다. 송파구에서 SRT를 타기 위해 수서역으로 가는 승객이었습니다. 그는 SNS를 통해 ‘길 위에서 쓴 편지’와 명씨를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꼭 한번 글을 써보고 싶다고도 생각했다는데요.

마침 그날은 오빠들의 산소에 가던 날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 병을 앓던 오빠 둘을 하루아침에 잃었다고 해요. 그리운 마음을 위로받고 싶던 날, 우연히 명씨의 택시를 타게 된 겁니다. 승객의 사연을 들은 명씨는 함께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10년 전 아내를 병으로 떠나보낸 기억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오빠를 잃었고 저는 집사람을 잃었어요. 그래서인지 마음이 아팠고,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어요”라고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그처럼 명씨의 노트를 우연처럼 만나길 고대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노트를 채우기 시작하면서 제가 '울리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다 쓰고 난 뒤 감정이 북받쳐 우는 승객들이 많더라고요." 명씨는 힘들 때 툭 털어놓을 수 있는 익명의 친구가 돼주는 셈이죠.

“다른 거 쓰지 말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세요”라는 그의 말 덕분일까요. 말 그대로 ‘나’의 이야기 혹은 내 이웃의 일상 속 고민이나 사연이 알려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노트가 중요한 매개체가 된 건 사실이지만, 명씨의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길 위에서 쓴 편지가 이렇게까지 위로가 될 순 없었을 겁니다.

“승객은 프로 작가가 아니에요. 순수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쓰더라고요. 그래서 그 글을 읽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음이 더 빨리 와닿는 게 아닐까요.”

김예슬·임수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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