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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詩도 라디오 원고도 '탁!'하고 걸리는 순간 잡아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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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숙의 가정음악' 오프닝 시 묶어 '카프카식 이별' 펴낸 김경미 시인

심유리, 제인 퍼듀…. 김경미(60) 시인의 가명들이다. 35년 넘게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한 시인은 KBS 클래식 FM '김미숙의 가정음악'에서 지난 2년여간 거의 매일 하루에 한 편씩 오프닝용 시를 썼다. 처음엔 가명으로 시를 소개하다가 "아무리 검색해도 안 나온다"는 청취자들 원성에 결국 정체를 밝혀야 했다. 그 시들을 묶어 '카프카식 이별'이란 시집을 냈다.

김 시인은 "라디오에서 시를 소개할 때마다 시인에게 주지 못하는 저작권료가 마음에 걸렸다"면서 "명색이 시인이니 직접 써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1983년 '비망록'으로 등단해 시집 '밤의 입국 심사' '고통을 달래는 순서' 등을 냈다. 방송작가로는 '서세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시작으로 '양희경의 가요응접실' '전기현의 음악풍경' 등을 맡았다.

조선일보

가명으로 라디오 오프닝 시를 쓰던 김경미 시인은 “애청자들 원성에 정체를 공개했다”며 웃었다. /고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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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하루 만에 쓴 시가 부끄럽기도 했다. 동료 시인들이 '그걸 시라고 썼냐' 비웃을까 봐 정체도 숨겼다. '문예지 발표 시'와는 절대 섞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노트까지 따로 구분해 썼다. 하지만 매일 한 편씩 시를 쓰며 오히려 "시적 치열함이 생겼다"고 한다. "시에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한 적이 있었나 돌아보게 됐어요.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매일 쓴다는 기분이 저를 더 열심히 살게 했죠."

라디오 오프닝인 만큼 매일 변하는 날씨와 계절, 자연이 시의 소재로 자주 쓰였다. '필 때 한 번/ 흩날릴 때 한 번/ 떨어져서 한 번'. 봄 한 번에 세 번씩 꽃을 피우는 나무에 감탄하거나, '여름엔 물이 꽃이다/ 물 찰랑대야 꽃이다'라며 물달개비·물채송화·물질경이처럼 물이 찰랑대는 낯선 꽃 이름들을 불러낸다. 새들을 위해 빵을 찢어 뿌리는 제빵사들을 보며 쓴 시 '오늘의 제빵' 시작(詩作) 노트에는 "제빵사들은 구름을 뜯어다 세상의 빈 곳들을 달콤하게 채우는 부드러움의 장인들"이라 썼다. 그는 "시도, 라디오 원고도 일상에서 오가다 탁하고 걸리는 순간을 잡아채야 한다"고 했다.

아침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받아쓴다는 청취자부터 시를 중국어로 번역해 인터넷에 올린다는 중국 팬까지 반응이 뜨겁다. 책으로 엮자고 그를 설득한 출판사 대표도 애청자 중 한 명이었다. 시인은 "조금은 망설이다가 시인으로서의 개성을 담아 고치고 다듬어 책을 내게 됐다"면서 "그동안 제 시가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 시들만큼은 무겁지 않게, 가볍지도 않게 읽히면 좋겠다"고 했다.

[백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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