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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트럼프 공약 또 '박살'...美 대법원, 낙태옹호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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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특파원(onscar@pressian.com)]
미국 대법원이 29일(현지시간) 여성의 낙태권을 제한하는 루이지애나 법안을 무효화하는 판결을 내놓았다. 대법원은 이날 낙태 병원 숫자를 제한하고 낙태 시술을 할 수 있는 의사 수에도 제한을 두는 루이지애나주의 낙태 의료시설 법이 헌법에서 보장한 여성의 낙태권을 침해한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1973년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통해 여성의 헌법적 권리라고 인정받은 낙태권을 제한하려는 시도는 보수적인 기독교 세력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있었다. 복음주의 기독교 세력이 핵심 지지계층 중 하나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대선 때부터 여성의 낙태권을 제한하는 방향의 정책을 대선 공약으로 제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하 직함 생략)은 또 집권 후 보수성향인 닐 고서치 대법관과 브렛 캐비노 대법관을 임명함으로써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려 했다.

이날은 대법원 구성이 보수 우위(보수 5 : 진보 4)로 바뀐 뒤 낙태 관련 첫 번째 판결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루이지애나주의 법에 대해 5대 4로 이 법이 위헌이라고 주장한 호프 메디컬 그룹의 손을 들어줬다. 보수성향의 존 로버츠 주니어 대법원장이 진보성향 대법관 4명의 편을 들었다.

이번 판결로 대법원은 6월 들어 세번째 트럼프의 주요 대선 공약을 뒤집는 판결을 내놓았다. 대법원은 앞서 성소수자에 대한 고용 차별을 금지하는 판결(15일), 불법체류청소년 추방유예프로그램(DACA) 폐지에 제동을 거는 판결(18일)을 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3번의 판결 모두 진보성향 대법관들의 의견에 함께 했다.

'보수' 로버츠 대법관은 왜 진보 대법관들 편에 섰나?

루이지애나주의 낙태 의료시설법은 약 30마일(48㎞) 내에 두 개 이상의 낙태 진료 시설을 두지 못하고 낙태 시술도 인정 특권((admitting privileges)을 가진 의사만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조건을 갖춘 병원은 루이지애나주를 통틀어 단 2곳에 불과한데, 그나마 1곳의 병원마저도 법적인 요건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 법이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이 날 경우, 루이지애나주에서 낙태가 합법적으로 가능한 병원은 주 전체를 통틀어 1곳만 남게 될 위기에 처했었다. 따라서 이 법은 '여성의 건강권 보호'를 이유로 낙태 가능 시설과 의사에 대한 까다로운 조건을 전제로 했지만 오히려 이런 조건들로 여성의 낙태권을 제한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여성의 건강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대법원은 "루이지애나 법은 낙태 시술 제공자의 수와 지리적 분포를 급격히 감소시켜 많은 여성이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를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지난 2016년에도 텍사스주의 거의 동일한 법률을 무효로 하는 판결을 내렸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에 대법관으로 임명된 로버츠 대법원장은 원래 낙태 반대론자였다. 그는 오바마 정부 시절 건강보험 관련 판결을 제외하고 줄곧 보수 성향의 판결을 내려왔다고 한다. 또 그는 대법원장으로서 지난해 트럼프 탄핵 사태 때 상원의 탄핵재판에서 주심을 맡았는데 당시에는 ‘최대한 신속하게’ 탄핵재판을 마무리 지으려는 트럼프의 기대에 크게 어긋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최근 트럼프의 재선 주요 공약과 연관된 판결에서 줄줄이 ‘보수 우위’ 대법원의 판결이라고 믿기 어려운 결정이 내려지고 있고, 여기에 로버츠 대법원장이 사실상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CNN은 이에 대해 “로버츠 대법원장은 보수성향의 대법원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기대를 산산조각 내고 있다”며 “지난 2주 동안 일련의 판결에서 로버츠는 자유주의 판사 4명의 편을 들었고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명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로버츠 대법원장은 표면적으로는 진보 대법관들의 편에 섰지만, 그렇다고 낙태 문제에 대한 판단이 바뀐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별도 의견을 통해 밝혔다. 그는 자신이 루이지애나 법에 대한 위헌 여부를 판단한 것이 아니라 이 사안이 기존 대법원 판례를 뒤집을 문제인지 절차에 대한 판단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선례 구속의 원칙(doctrine of stare decisis)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비슷한 사건들을 같게 취급할 것을 요구한다"면서 "루이지애나 법은 낙태에 대한 접근에 있어 텍사스 법이 부과한 것과 같은 심각한 부담을 부과한다"며 전례에 따라 루이지애나 법도 유지될 수 없다고 밝혔다. 즉, 그의 입장은 4년 전 대법원이 기각한 텍사스주의 법률과 거의 일치하는 루이지애나법률을 근거로 여성의 낙태권을 제한하는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4년 전 텍사스주 법에 대한 판결 때는 보수 쪽의 손을 들어줬다.

<복스>는 “로버츠 대법원장은 텍사스주 판결에서 법원의 일부 분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향후 낙태에 대한 헌법상의 권리를 제한하는 쪽으로 판결할 가능성이 높다는 암시가 가득하다”고 그의 미묘한 정치적 줄타기에 대해 지적했다.

트럼프 백악관 “유감스러운 판결”

한편 백악관은 이날 대법원 판결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제기했다. 케일리 매커내니 백악관 대변인은 "유감스러운 판결"이라며 "선출직이 아닌 대법관들이 자신의 정책 선호에 따라 낙태에 찬성해 주 정부의 자주적인 특권을 침해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민주당 대선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대법원 판결을 환영하는 성명을 냈다. 그는 "전국적으로 여러 주들이 어떤 환경에서도 옳은 선택을 할 여성들의 헌법적 권리를 극도로 제약하는 법들을 제정함올서 여성들의 건강권이 공격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홍기혜 특파원(onscar@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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