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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취재파일] '금싸라기 땅' 용산 개발…"과도한 업무·상업시설은 자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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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 조감도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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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개발 소식은 사람들을 흥분시킵니다. 입지가 좋은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국내에서 마지막 남은 금싸라기 땅'으로 불리는 '서울 용산'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 광화문-서울역-용산역-남산-한강으로 연결되는 탁월한 지리적 위치, 그것도 무려 50만㎡가 넘는 광대한 부지. 매력적이지 않기가 어렵습니다.

서울 용산역 철도정비창 부지는 애초 2006년 국제업무지구로 재탄생할 예정이었습니다. 초고층 빌딩 '트리플원'과 23개 동 빌딩 건설계획 등이 발표되며 용산은 말 그대로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그러나 흥분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개발 시행사 부도와 부지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 세계금융위기 등으로 개발계획은 2013년 끝내 좌초됐습니다. 그리고 용산은 침묵의 시간으로 접어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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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초한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 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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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째로 개발하겠다"…'침묵의 시간'을 깬 박원순 서울시장

침묵을 깬 것은 박원순 서울시장이었습니다. 박 시장은 2018년 "여의도와 용산을 통째로 개발하겠다"라며 '용산 마스터플랜' 계획을 발표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폭등하고 있던 '집값'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시세 차익' 기대에 매물은 감소했고, 호가는 하루 새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집값만은 반드시 잡겠다"고 천명한 정부가 이를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국회에 출석해 "도시 계획은 시장이 발표할 수 있겠으나, 실질적으로 진행되려면 국토부와 긴밀한 협의 아래 이뤄져야 실현 가능성이 있다"라며 박 시장을 직접 겨냥했습니다. 이 같은 국토부의 강경한 방침에, 박 시장도 결국 개발계획을 백지화했습니다. 용산은 또다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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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시장, 여의도·용산 마스터플랜 발표 7주 만에 '보류'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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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가 '직접 꺼낸' 용산 개발계획…핵심은 '대규모 주택단지' 공급

그로부터 2년가량이 지난 지난달, 용산 개발이 드디어 가시화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시쳇말로 정부 발 '오피셜'이 뜬 것입니다. 하지만 메시지는 바뀌어 있었습니다. 국토부는 "철도정비창 부지에 주택 8천 가구가 들어설 것이며, 이 가운데 30%가량은 공공주택으로 공급한다"라고 발표한 것입니다. 2018년 말 과천 택지 공급량이 7천 가구인 것을 고려하면 서울 도심 한복판에 '미니 신도시'가 들어서는 셈인데, 핵심은 상업·업무시설을 줄이고 대신 대규모 주거단지를 조성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앞서 2006년 당시 주택 공급계획이 3~5천 가구였던 점을 고려하면, 8천 가구는 최대 3배 가까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번 개발의 방점이 '주택 공급'에 있다는 것이 선명해진 것입니다. 물론 국제업무지구로 계획했던 호텔과 쇼핑몰 등 상업·업무·국제 전시시설도 들어설 계획이지만, 결론적으로 그 비중은 줄고 대신 주택 비중, 그 가운데서도 임대주택 비중이 커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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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용산 철도 정비창 부지 개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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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과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정부는 곧바로 정비창 부지와 인근의 13개 정비사업 구역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해버렸습니다. 이들 지역에서 주거지역은 18㎡, 상업지역은 20㎡를 초과한 토지를 취득할 때 구청장 허가를 받아야 하고, 2년 이상은 허가받은 목적대로 직접 살거나 영업해야 합니다. 실수요자에게만 부동산 취득을 허용해 투기를 막겠다는 것입니다. 김영한 국토부 토지정책관도 "지가 상승 기대심리를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라고 의도를 굳이 숨기지 않았습니다.

● 용산 서부 "개발 환영" vs 동부 "임대주택 실망"

달라진 계획에 현지 주민 반응도 엇갈렸습니다. 이웃 동부이촌동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서부이촌동 주민은 "드디어 개발이 이뤄진다"라며 반겼습니다. 지자체가 아닌 정부가 직접 개발계획을 발표한 만큼, 이번에는 틀림없이 개발이 이뤄진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이 지역 부동산에는 매수 문의가 늘어났고, 일부 주민은 급매물을 거둬들이고 호가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반면 전통적인 부촌으로 알려진 동부이촌동 주민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주민들은 "3.3㎡당 1억 원이 넘는 금싸라기 땅을 업무·상업지구로 개발해야지, 웬 소형·임대아파트냐? 이것이 정상적인 판단이냐?"라며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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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철도 정비창 인근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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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규모 주택 vs 상업·업무시설…"강남·여의도 수요를 빼내 와야 생존"

정답은 없습니다. 대규모 주택 건설도, 상업·업무시설도, 저마다 나름의 명분은 물론 실리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취재 과정에서 20여 명에 가까운 부동 관련 교수와 연구원, 분석가들에게 용산 개발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그들 의견도 제각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전문가 중 다수가 동의한 사실은 '서울이 경제적으로 활발하게 성장하는 도시는 아니다'라는 점이었습니다. 부동산 경제학자인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서울은 과거처럼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도시가 아니라 이미 저(低)성장기에 접어든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심에 대규모 상업업무 시설을 지으면 부작용이 불가피하다. 공실이 생기는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투자 자체를 못 받아 착공조차 못 할지 모른다"고 우려했습니다.

그러면서 "용산에 대규모 상업·업무시설이 들어서면 결국 강남이나 여의도에 있던 수요를 빼내 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용산을 채울 수 없다. 더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시대'가 아니다. 과도한 공급은 결국 자충수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규모 주택 공급은 정부로서도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라고 분석했습니다. 다시 말해, 대규모 주택 공급 없이는 용산 개발 자체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 '경제 성장 둔화'·언택트' 시대…도심 내 상업·업무시설 필요성 ↓

실제로 통계청이 발표한 서울의 지역 내 총생산(GRDP) 실질성장률을 보면, 용산 개발 논의가 시작될 무렵인 1999년~2001년 3년 평균은 8.56%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최근 통계인 2016년~2018년 평균을 보면 2.93%로 크게 낮아졌습니다. 그만큼 서울의 경제 성장폭이 완만해졌다는 뜻입니다.

또, 영국 컨설팅그룹 지옌이 발표한 국제금융센터지수(GFCI)를 봐도, 서울의 금융경쟁력은 2015년 6위에서 14위, 27위 등 매년 떨어져 올해는 33위를 기록했습니다. 뉴욕과 런던에 이어 이웃인 도쿄와 상하이, 싱가포르, 홍콩, 베이징이 각각 3위에서 7위를 차지한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더욱이 서울에 있던 많은 기업과 상업·영업시설이 이미 성남을 비롯해 용인, 수원, 인천 송도 심지어 제주 등으로 빠져나갔고, 또 그런 이탈 현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IT 기술과 교통 등을 고려하면 상업·업무시설이 서울 도심에 있어야 할 필요성은 점차 옅어지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이 때문에, '상업·업무시설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이 살 주거지를 공급하는 것이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용산 국제업무지구가 처음 추진 당시 자문 역할을 맡았던 정창무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도 "주거 비율이 30% 정도 되면 야간에도 상권이 활성화될 수 있어 오히려 적절하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주택정책연구실장도 "10년 전 만에도 도심을 중심으로 한 경제·상업 수요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그런 현상이 많이 줄었다. 그만큼 전 세계적으로 경제활동 양태가 변한 것이다. 특히 앞으로는 코로나19 사태로 비대면·비접촉 업무와 경제가 활발해지는 이른바 '언택트(untact)' 시대가 올 것인데, 이런 시설들이 도심에 있을 필요성은 더 줄어들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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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철도 정비창 개발 예정 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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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와 도심을 연결하는 시너지의 중심지가 될 것"

정비창 부지는 2023년 사업 승인을 거쳐 이르면 2024년쯤 분양이 시작될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현재 진행 중인 정비사업 속도 등을 고려하면 실제로 변화한 용산의 모습은 앞으로 10년에서 15년 이후쯤 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전문가들은 그때까지 중지를 잘 모은다면, 용산이 경제·문화적으로 여의도와 도심을 연결하는 시너지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라고 전망했습니다. 그 가능성을 높이고 현실화하는 것은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입니다.

국내 1세대 건축가로,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김종성 건축가는 앞서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화려하고 멋있는 외국 건축을 보면서 감탄하기보다는 건축의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 비바람을 막고 오래 서 있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 그것을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 '기본을 향한 치열한 고민'이 용산에도 잘 담기길 기대합니다.
한세현 기자(vetma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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