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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법과사회] "주거의 평온 보호", 서울역 폭행범 풀려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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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서울역 폭행범 긴급체포 적법성 문제로 구속영장 기각

"피의자 신원 이미 파악..자고 있어 증거인멸 할 상황도 아냐"

구속영장 심사 까다로운 인신구속 제도

피해자 가족 "추가 피해자 보호할 법 어디있나"

[이데일리 장영락 기자] [법과사회]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 때로는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법과 사회’에서는 사회적 갈등, 논쟁과 관련된 법을 다룹니다.

서울역에서 지나가던 여성을 폭행한 범인이 경찰에 체포되고도 하루 만에 풀려났습니다. 법원이 긴급체포 적법성을 문제 삼아 구속영장을 기각했기 때문입니다. 공공장소에서 이유도 없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한 인물의 ‘긴급히 체포할 사유’를 인정하지 않은 법원 판단에 의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체포는 법에 근거한 영장에 따라”

영장제도는 체포, 수색, 구속 등 형사법상 강제 행위가 법에 근거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체포나 구속은 필연적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신체의 자유 등 기본권을 침해하게 되는데, 공익을 이유로 불가피하게 이러한 침해행위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법의 판단을 거쳐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범죄자의 체포 역시 마찬가지로, 형사소송법은 사전에 구속영장을 청구해야만 피의자를 체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단 몇가지 예외를 두고 있는데, 먼저 범죄를 저지른 직후인 현행범은 영장 없이 체포가 가능합니다.

또 형사소송법 제200조의3에 따라 긴급체포가 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사형·무기 또는 장기 3년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피의자가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는 때, 피의자가 도망하거나 도망할 우려가 있는 때”에는 검사나 경찰이 긴급체포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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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묻지마 폭행 혐의를 받는 이모씨가 4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철도경찰 호송 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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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자고 있어 증거 인멸 상황 아냐”, 체포 긴급성 기각한 법원

이번에 법원이 문제를 삼은 것은 폭행범의 긴급체포가 이같은 사유에 적합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법원은 영장주의 원칙을 거론하며 “긴급체포 제도는 영장주의 원칙에 대한 예외인 만큼 형사소송법이 규정하는 요건을 모두 갖춘 경우에 한해 허용돼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철도경찰은 CCTV 영상과 탐문을 거쳐 피의자 성명, 주거지, 휴대전화 번호 등을 파악한 뒤 주거지를 찾아 문을 두드리고 전화까지 걸었으나 반응이 없자 강제로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 잠을 자던 피의자를 긴급체포했습니다. 법원은 이 과정에서 경찰이 “이미 피의자 신원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 “피의자가 잠을 자고 있어 증거를 인멸할 상황도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긴급하게 체포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법원은 “한 사람의 집은 그의 성채라고 할 것인데, 비록 범죄 혐의자라 할지라도 헌법과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주거의 평온을 보호받음에 있어 예외를 둘 수 없다”며 개인 주거의 신성성을 거론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긴급체포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이같은 법원 판단이 공정하고 일관된 기준을 적용한 것인지는 의문이 남습니다. 물론 과거 판례에도 적법성 문제를 들어 긴급체포를 기각한 사례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저히 합리성을 잃은 경우”가 아니라면 수사관들의 체포 판단을 존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심지어 고소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으러 온 사람이 조서 날인을 거부하자 검사가 그 자리에서 무고죄로 인지하여 체포한 것도 적법하다는 판례조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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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씨 범행 당시 CCTV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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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심사 까다롭게 하는 인신구속 제도

한국 법원이 구속영장 발부 여부를 엄격하게 따지게 된 것은 국내 인신구속 제도 자체의 특성과도 관련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인신구속이 체포와 구속으로 이원화된 한국과 달리 ‘arrest(구속)’로 일원화돼 있어 구속이 피의자 신문 없이 수사기관의 자료제출만으로도 허용되며, 대부분 영장이 발부됩니다. 단, 체포 이후 피의자는 곧장 방어권 보장을 위해 기소인부절차(arraignment)에서 보석으로 석방될 권리를 가집니다. 다만 중죄의 경우 법원이 보석을 불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 우리의 경우 구속영장이 발부돼 인신구속 상태가 되면 방어권 보장을 받기 매우 어려워집니다. 법원이 영장실질심사를 통해 구속 여부를 엄격하게 따지는 데는 이같은 사정도 반영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번 사건에서 법원이 주거 침해의 위법성을 상술한 것 역시 영장 남발의 위험성을 설득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될 만 합니다.

그럼에도 서울역 폭행범의 영장 기각 사례는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것으로 보입니다. 이 폭행범이 이전에도 행인들을 치고 가는 등 범행을 노렸다는 점이 제보와 CCTV 영상 등으로 확인돼 향후 추가 범죄까지 우려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정의에 대한 일반 국민의 감각이 “주거의 평온을 보호받는데 예외가 없다”는 법관의 말보다, “동생과 추가 피해자들을 보호하는 법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는 피해자 가족의 질문에 더 가까워 보이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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