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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준 신의 선물" "최강 美꺾어"日·中의 6.25 기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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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톺아보기-16] ※톺아보기란 '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아본다'는 순우리말입니다. 한중일 톺아보기는 동북아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이슈부터 소소한 소식까지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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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65회 현충일 입니다. 현충일은 올해 발발 70주년을 맞은 6·25전쟁이 계기가 된 기념일로, 매년 대통령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은 물론 많은 국민이 현충원을 찾아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립니다. 이맘때쯤 백발이 성성한 참전용사들이 기적적으로 발전한 대한민국의 모습에 감회를 밝히는 장면도 흔한 광경이죠.

한민족에게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수백만 명의 사상자와 분단의 상처를 남겼다는 점에서 6·25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아픔입니다. 초기 내전 양상을 보였던 6·25는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중공, 소련의 개입으로 국제전으로 치달았는데요. 같은 시공간에 있었던 역사임에도 6·25에 대한 기억과 해석은 참전국들간에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한반도의 주인도 아니면서 전쟁에 가장 깊숙이 관여한 나라인 중국, 그리고 식민지배로 전쟁과 분단의 단초를 제공한 일본에서 6·25는 과연 어떻게 기억되고 이해되고 있을까요?


중국 "우린 한국 아닌 미국과 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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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 운동`의 선전물. "중국 인민은 결코 외국의 침략을 용인할 수 없으며, 제국주의자들이 이웃을 짓밟는 것을 허용할수도 방관할 수도 없다"라고 씌어 있다/=chineseposter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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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중국에 대해 갖는 가장 부정적인 기억 중 하나가 바로 6·25일 겁니다. 마오쩌둥의 지원 약속을 받고 북한이 남침을 단행한 데다 중공군 개입으로 수많은 국군이 희생됐고 통일도 좌절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6·25는 북한군 이상으로 중공군과 싸운 전쟁으로 인식되는 데 반해 중국에서는 한국과 싸운 전쟁이란 인식이 거의 없습니다. 중국은 6·25를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즉 미국의 침략에 대항해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고 보고, 자신들이 싸운 적은 미국이라고 주장하죠. 전체 참전국 중 최대인 131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중국 국민이 이와 관련해 미국에 적대의식을 갖는 데 비해, 한국에 대한 적대의식은 미미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6·25를 다룬 중국 역사 교과서와 방송·영화 등에서도 한국군에 대한 비중은 매우 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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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에서의 승리"를 강조한 중국 시진핑 주석과 화웨이 런정페이 회장/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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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인식은 중국 국민뿐 아니라 정치 지도자와 기업 총수 등 사회지도층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017년 북한을 찾은 시진핑 주석은 "미 제국주의 침략에 항거하고 북조선을 도운 정의로운 항미원조전에서 국위를 떨쳤다"고 말했고, 지난해 인민해방군 창설 90주년 연설에서도 같은 발언을 반복했죠. 같은 해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도 미국과의 무역전쟁 국면에서 "항미원조전에서 승리한 상감령전투 때처럼 미국 제재에 맞설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마오쩌둥 "싸워야 한다면 中영토 밖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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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정부수립 70주년 전시에 김일성이 6·25 당시 마오쩌둥에게 보낸 파병 요청 친필 편지/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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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단순히 김일성의 파병 요청과 스탈린의 요구 때문에 전쟁에 개입한 건 물론 아닙니다. 모든 결정은 마오쩌둥과 공산당 수뇌부의 전략적 판단의 결과입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한반도를 해양세력으로부터 중국 대륙 침략을 막아주는 완충지대로 인식해왔고 이용해왔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이라는 안보위협에 맞설 북한이라는 완충지대는 지금도 그때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428년 전 임진왜란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에서 임진왜란은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戰爭)', 즉 일본의 침략에 대항해 조선을 도와준 전쟁으로 불리는데요. 시혜적 느낌이 드는 이 명칭 이면에 중국의 집요한 한반도 개입 의지와 일본의 중국 본토 진입 이전에 이를 저지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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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명나라 총사령관 이여송의 초상. 평양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지만 약탈, 강간 등을 저질러 비판도 컸다(좌)/평양성과 대동강의 모습(19세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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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중국 학자들은 미국이 중국에 안긴 안보 불안이 중공군 개입의 직접적 원인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반격이 38선 이남에서 멈췄다면, 중공군 개입도 피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죠.

그러나 천젠 코넬대 교수와 소련 붕괴 후 공개된 사료들에 따르면, 중국은 인천상륙작전 이전인 1950년 8월 이미 중공군 투입을 결정한 상태였고, 그로부터 한 달여 전에 전쟁 준비에 돌입해 있었습니다. 결국 중공군 개입은 연합군의 북진과 상관없이 미국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본 중국 지도부의 판단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왕 전쟁을 해야 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게 중국 영토 바깥에서 치르는 편이 낫다고 본 겁니다.

또한 당시 소련에 정치경제적으로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중국은 군의 현대화를 위해 소련의 군사·경제적 지원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위해 중국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의심하는 스탈린의 경계심을 파병으로 불식할 필요가 있었죠. 중국 측이 중공군 개입의 중요 원인이라 주장하는 미국의 대만 파병 문제도 있습니다. 홍콩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추이 박사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에 출병한 중국은 심지어 전쟁 결과에 따라 미국과의 딜을 통해 한반도 일부와 대만을 맞바꿀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인민망 "6·25는 미국에 첫 패배 안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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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항미원조·보가위국 선전물(좌)/패배를 모르던 미국에 첫 패배를 안겼다고 선전하는 게시물/사진=인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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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매년 10월 25일을 '항미원조 기념일'로 기리며 북한과 축전을 주고받아 왔습니다. 1950년 10월 25일은 중공군이 한반도에 처음 진입한 날로, 지난해 10월 25일 중국 공산당 기관 매체인 인민망에 게재된 게시물을 통해 중국 당국이 6·25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해당 게시물에서 중국은 미국의 침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선 '항미원조' '보가위국'(保家衛國·집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킴) 전쟁에서 무패였던 미국에 첫 패배를 안겼다고 주장합니다. 이 같은 미국에 대한 승리 선전은 미·중 무역분쟁이 거세지기 시작한 최근 시점부터 더 두드러지는 모습입니다.

결과적으로 중국의 6·25 참전은 대외적으로 신생국이 무패 전적을 자랑한 최강대국 미국에 승리했다고 선전하고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중심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발판이 됐습니다. 또한 대내적으로 내부의 반혁명세력 등 반대파를 제거하는 계기로 삼은 한편, 자국민에게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주어 내적 결속을 도모하고 정치·이념적 통제도 강화할 수 있었죠.


6.25 터지자 日총리 "신의 선물"…'조선 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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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6·25와 관련된 사회적 관심은 중국에 비해 매우 적습니다.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도 6·25와 관련된 부분은 독립된 장을 이루지 않고 세계사와 관련된 내용과 맞물려 약간씩 서술되고 있는 정도죠.

6·25가 일본에 미친 영향에 대한 내용이 주인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말 중 하나는 '조선 특수'라는 단어입니다. 조선 특수란 일본이 미국의 병참기지로서 전쟁물자를 공급한 것이 일본 경제의 부흥으로 이어진 것을 말합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미국의 군수물자 구매액은 당시 돈으로 3년간 10억달러, 1955년까지 간접 특수로 36억달러에 달했습니다. 일본경제기획청에 따르면, 1950년부터 1955년 사이 일본이 조선 특수로 벌어들인 외화 수입은 약 40억달러로, 당시 일본 한 해 국내총생산(GDP)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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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자동차 수출도 전쟁 발발 전후 1년 새 400배 이상 늘어 도요다 에이지 전 도요타자동차 회장이 회고록에서 6·25를 "구제의 신(神)"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6·25 발발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가 "신(神)이 내린 선물" 이라며 "이제 일본은 살았다"고 말한 일화는 계속 회자되고 있으며, 그의 외손자이자 현 일본 부총리인 아소 타로는 "운 좋게 한국전쟁이 일어나 일본 경제 재건이 빨라졌다"고 발언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죠.

조선 특수가 일본 경제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조선 특수와 일본 경제 부흥의 연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조선 특수는 우익 성향의 후소샤 '새 역사 교과서'를 포함해 모든 일본 역사 교과서에 공통적으로 등장할 만큼 일본에서도 관심 있게 다뤄지고 있는 이슈입니다.


日에 재무장·주권 회복 기회…역사·영토 문제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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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주카포 훈련을 하는 일본 경찰예비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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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일본에 재무장하는 '기회'를 안겼습니다. 당초 맥아더 연합군최고사령부(GHQ) 사령관은 일본의 재무장을 금지했었지만, 6·25가 터지자 자위대의 모태가 되는 '경찰예비대' 창설을 허가했고, 해상보안청 인원도 늘려줬습니다. 또한 일본 기업에 포탄 등 각종 무기의 생산 허가를 내주고, 항공기 수리 등을 발주해 중공업 관련 기술력이 보존될 수 있게 했죠.

재무장과 함께 6·25 기간 중 일본에 매우 중요했던 사안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으로, 모든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6·25 발발은 샌프란시스코조약 체결을 촉진했고, 패전국 일본은 이 조약을 통해 주권을 회복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샌프란시스코조약에 명시된 한국의 독립 시점에 대한 것으로, 일본은 이 조약 체결 이전 한일병합의 무효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는 아직까지 과거사 문제가 풀리지 않게 하는 불씨가 됩니다. 현재 일본의 모든 역사 교과서가 한국의 완전 독립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이후로 서술하고 있는 것은, 곧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본 측의 치열한 로비로 당초 한국령으로 표시됐던 독도가 최종 조약문에서 빠진 것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구실이 되고 있습니다.


6·25 진실 왜곡하는 中·백선엽 공방 보도하는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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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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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은 나라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진실이 명백한 사건까지 왜곡하는 경우입니다. 최근 중국 인민망은 6·25를 두고 "남북 쌍방이 어떻게 통일을 실현할 것인가로 투쟁하다 전쟁이 터졌다"고 설명해 책임 소재를 흐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시진핑 주석 또한 지난해 6월 평양을 찾아 "북한이 침략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이 용감한 희생을 치렀다"고 말해 북한의 남침을 부정하는 발언을 한 바 있죠.

지난주 정치권에서는 '친일파 파묘법' 추진과 함께 6·25 영웅으로 불리는 백선엽 장군의 국립묘지 안장을 두고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논란이 가라앉지 않자 보훈처장이 나서 "백 장군은 현행법상 현충원 안장 대상이 맞고, 다른 의견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사태 진화에 나서기도 했죠. 일본 매체들은 이와 관련 한국에서 반일법을 만든다고 보도하며 정의연 사태에 이어 반한감정을 부추기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백 장군에게 '구국의 영웅'과 '친일파'라는 두 수식어가 병존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별다른 실익이 없어 보이는 이 같은 때아닌 논쟁이 현재 대한민국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이로 인한 분열과 갈등이 계속됐을 때 웃는 건 과연 어느 나라들일지, 곱씹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신윤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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