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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특파원 리포트] 빚 늘려야 박수 받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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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프랑스 좌파 진영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악인으로 묘사한다. 마크롱이 2018년 한 해에만 공공병원 병상 4172개를 없앴고, 그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 사망자가 많았다며 거칠게 비난한다. 병상을 줄인 건 사실이다. 마크롱이 방역을 잘했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병상 감축이 과연 그가 냉혈한이라 선택한 길이었을까.

프랑스는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을 2016년 이후 4년 내리 98%대로 억제했다. 이유가 있다. 100%를 넘어 세 자릿수가 되는 순간 상징적으로 '재정이 엉망인 나라'가 된다. 국가 신용도가 급락한다. 마지노선에 내몰린 마크롱 행정부는 허리띠를 바짝 졸랐다. 현금 복지를 줄이는 건 저항이 심하니 당장 급하지 않은 지출을 감액했다. 결과적으로 악수였지만 병상 줄이기는 '재정 다이어트' 과정에서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마크롱이 심성 나쁜 지도자라기보다 이미 살림이 망가진 정부를 물려받아 고군분투한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

프랑스의 사회복지 지출은 GDP 대비 31%로 OECD 회원국 36곳 중 가장 높다. 액수로는 한 해 1060조원에 달한다. 빚 폭발의 시발점은 언제였을까. 첫 좌파 대통령인 프랑수아 미테랑이 1981년부터 14년간 집권하던 시기다. 14년간 좌향좌 정책으로 내달리는 사이 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이 15%에서 28%로 급격히 뛰어올랐다. 마크롱은 오래전 미테랑이 설치한 빚의 올가미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있다. 프랑스 좌파들은 스스로 천문학적 빚을 일으켜놓고 이걸 수습하려고 지출을 억제하는 우파 정부를 향해 비정하다며 성토한다.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꼴이다.

궁지에 몰린 마크롱을 보면 올해 초 폴란드에서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을 인터뷰할 때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현금 복지는 재정이 바닥나면 언젠가는 중단할 수밖에 없어요. 그 순간 국민은 돈을 주던 과거 정부는 유능한 정부, 더 이상 돈을 주지 않는 현재 정부는 무능한 정부로 여깁니다. 애초에 그런 늪에 빠져들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바웬사의 진단대로 위정자가 돈을 살포하면 박수 받고 씀씀이를 줄이면 악인이 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특히 불평등 가속화와 맞물려 빚을 늘려서라도 돈을 풀어젖히는 정치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스페인 국민은 나랏빚 줄이는 고통 분담이 싫다며 경제를 살려놓은 우파 정권을 버리고 방만한 살림으로 나라를 무너뜨린 좌파 정부를 다시 선택했다. 재정이 파탄 난 그리스에서는 지난해 좌파에서 우파로 정권 교체가 이뤄지며 회생을 도모했다. 하지만 나랏돈 살포를 줄이자 살기가 팍팍해졌다며 금세 시위를 벌였다. 이런 장면이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한국도 바웬사가 경고한 '현금 중독의 늪'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손진석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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