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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魚友야담] 개좋아·개이뻐·개똑똑… 그리고 개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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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조선일보

어수웅·주말뉴스부장


고등학생이 미워할 수 없는 악당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를 넷플릭스에서 봤습니다. 교실에서 한 여학생이 친구의 참견 반경에 감탄하며 말하더군요. "오지랖, 개쩔어."

접두사 '개'는 원래 좋은 뜻이 아닙니다. 사전적 정의는 '야생의, 질이 떨어지는, 헛된, 정도가 심한' 등이죠. '개떡' '개꿈' '개망나니' 등이 대표적 용례입니다. 하지만 요즘 세대는 주지하다시피 과잉 긍정의 속어로 자주 쓰죠. '개좋아' '개똑똑' '개이득' '개이뻐' '개간지'…. 그야말로 만능 접두사의 출현입니다.

4년 전 대전에서 인터뷰했던 자칭 어도락가(語道樂家) 신견식씨 생각이 났습니다. 식도락가가 음식과 요리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언어를 두루 맛보고 즐기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인 별명입니다. 10개 언어를 사전 없이 읽을 수 있고, 사전을 참조한다면 라틴어, 핀란드어, 터키어 등 15개 언어를 번역할 수 있다는 언어의 귀재죠. 최근에 그가 펴낸 '언어의 우주에서 유쾌하게 항해하는 법'(사이드웨이 刊)에도 이 만능 접두사가 등장하더군요.

언어의 귀재답게 흥미로운 건 해외 사례. 스페인어 '께'(qué)는 '무엇' 혹은 '무슨'의 의미인데, 감탄 부사로도 활용이 가능하다는군요. '께 보니따'(qué bonita)는 '개이뻐' '께 소르쁘레사(qué sorpresa)는 '개놀람'으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칠레에서 '께쪼로'(¡qué choro)는 '멋져·대단해'의 의미인데, 서두의 드라마 대사가 포개졌습니다. '개쩔어'와 '께쪼로'라니, 정말 '개난감'이군요. 어도락가는 발음 말고 훈독으로도 다른 사례를 찾았습니다. 영어 dog-tired와 독일어 hundmüde. 말그대로 '개피곤'이죠.

오지랖 넓은 한국어 접두사만으로도 피곤한데, 무슨 해외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밥이나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개'와 '께'와 'dog'와 'hund'라는 언어의 대륙을 유쾌하게 항해하는 이 어도락가의 존재가 저는 반갑습니다. 무용해서 유용한 것. 좋아하면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며, 잘하면 주변에서 찾는다고 했죠. 물론, 언어에만 해당되는 사례는 아닐 겁니다.

[어수웅·주말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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