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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김형석의 100세일기] 현승종·박대선·윤성범·유동식 교수와의 인연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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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조선일보

일러스트= 김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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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 나보다 1년 선배인 현승종 교수가 작고했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으나 평안도 기질과 성품이 농후한 분이어서 마음으로는 서로 믿고 가까이 지냈다.

그가 교원단체 연합회 회장 때였던 것 같다. 내가 기념 강연 강사로 초대되어 몇 사람이 대기실에서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현승종 선생이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귓속말로 "한일 축구경기를 꼭 보고 싶은데 사회는 부회장에게 부탁하고 나는 TV 좀 보면 안 돼? 미안해요"라는 간청이었다. 나도 "결과는 얘기해 주세요"라고 답하곤 강연장으로 들어간 일이 있었다. 전국적인 행사를 맡은 책임자였지만 축구경기는 몹시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돌아가신 연세대 박대선(1916~2010) 총장은 큰 체구에 근엄한 분이었다. 그와 동갑내기 윤성범(1916~1980) 교수는 나보다도 왜소했고 부잣집 맏며느리 이상으로 조용한 편이었다. 긴 세월 감리교신학대학에서 함께 일한 사이다.

한번은 윤 교수가 "연세대에서 박대선 총장 예우를 좀 잘해야 되겠던데요. 너무 가난하게 고생하는 모습이 딱해서 지난 정초에는 내가 세뱃돈을 크게 보태주었을 정도였어요"라고 했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더니 "박 총장을 만나면 얘기해 줄 겁니다"라면서 여전히 담담한 자세였다. 며칠 후에 박 총장을 만나 얘기를 듣고 둘이서 한바탕 웃었다.

정초에 두 친구가 만났단다. 윤 교수가 "친하다고 해서 예의까지 흩어져서는 안 될 테니까 우리 정중히 세배를 나눕시다"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박 총장은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그 틈에 윤 교수는 양반다리를 하곤 절을 받았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당시 백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요사이 생활도 옹색할 테니까 용돈으로 쓰세요"라면서 건네주었다. 그때야 박 총장은 '내가 또 당했구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올 초에 신문으로 소식을 접한 유동식(1922~) 교수도 이 글을 읽으면 무릎을 치면서 웃을 것 같다. 나보다 두 분 사이를 더 잘 알고 있는 증인이다. 나는 백세를 앞둔 유동식 교수를 만나 '하늘나라에도 그런 재미는 없을 것 같지요?'라면서 함께 웃고 싶다.

6·25 피란 시절에 나는 중앙학교 분교를 위해 부산에 머물렀고, 고려대는 대구에 임시 교사(校舍)가 있었다. 부산에서 대학 선배인 C교수와 중학교 때 은사이기도 했던 K교수를 만났다.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이기는 해도 대구로 강의 다니기가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다. C교수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피란 생활에 울적하다가 대구에 가면 더 좋은 일이 있어. 학교 부근 다방 마담이 보기 드문 미인이어서 만나는 즐거움이 있고, 가까이에 칼국수 집 음식이 별미여서 손꼽아 기다리게 돼."

당시에 공감은 하면서도 '우리 (중앙학교) 중고등학생들이 이런 얘기를 들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훗날 나이 들어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나라 걱정은 나라 걱정대로 해야 하지만, 가끔 이런 소박한 재미도 없으면 대체 무슨 맛으로 사는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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