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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장 “이 훈장은 전사한 전우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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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지상군, 오산 죽미령 첫 전투

동아일보

1970년 6월 미국 애리조나주로 찰스 스미스 씨를 찾아간 지갑종 회장(왼쪽). 유엔한국참전국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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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개전 초기인 1950년 7월 5일, 경기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미군이 격전을 벌였다. 미 지상군이 6·25전쟁에서 치른 첫 전투였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6시간 15분간의 교전 끝에 탱크 4대를 파괴했으나 17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지연작전 덕분에 한국군은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이 부대를 이끌었던 찰스 스미스 예비역 준장(당시 중령)은 1975년 무공훈장 중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6·25전쟁 이후 생사가 불분명했던 그를 찾아낸 것도, 한국 정부를 설득해 최고 훈장을 수여하게 한 것도 지갑종 유엔한국참전국협회장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 회장은 “누군가 오보를 해서 스미스가 6·25 때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며 “1968년 오산전투 추도식 때 한 중령이 ‘스미스 장군이 지금 애리조나에 살고 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미 육군사관학교의 1939년 졸업생 명단을 확인해 애리조나주 피닉스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지 회장은 2년 뒤 피닉스에서 스미스 씨와 만났다. “한국에서 무슨 훈장을 받았냐”고 물었더니 “아무것도 받은 게 없다”고 했다. 가방에 있던 태극기를 전해준 뒤 귀국해 정부에 태극무공훈장 수여를 건의했다.

스미스 씨는 6·25전쟁 25주년이었던 1975년 7월 방한해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날 저녁 지 회장을 찾아가 이렇게 고백했다.

“이 훈장은 내 것이 아닙니다. 전사한 전우들의 것이요, 한 위생병의 것입니다.”

스미스 씨는 1950년 7월 5일 오후 2시 반 후퇴 명령을 내렸는데 한 위생병이 손을 들더니 “나는 후퇴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곳에 부상자가 있어서 자신은 갈 수 없다는 이유였다. 스미스 씨는 “오늘 큰 훈장을 받고 나니 그 위생병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말했다고 지 회장은 전했다. 스미스 씨는 2004년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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