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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허연의 책과 지성] 가끔 하루가 백년같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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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세상엔 무수히 많은 책이 있다. 널리 알려진 책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책도 있다. 알려지지 않은 책 중에서 숨은 보석을 발견하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이다.

친기즈 아이트마토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는 보석이다. 단 한 편의 소설에 삶과 죽음은 물론 사막과 우주, 사랑과 이별, 이념과 종교 그리고 전설과 현대사가 믿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럽게 수놓아져 있다.

아이트마토프는 키르기스스탄 출신 작가다. 작가가 활동했던 시절 키르기스스탄이 옛 소련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소개하는 외국 사이트에는 주로 러시아 작가라고 나온다.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워낙 명석하고 글을 잘 썼던 아이트마토프는 소비에트 정부의 서기로 채용돼 청소년 시절을 보낸다. 문학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그는 20대 중반 문학전문학교에 입학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대표작 '백년보다 긴 하루'는 단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일이 줄거리다.

소설의 무대는 1980년대 카자흐스탄 사르제끄 스텝 평원. 평원에는 간이역이 있다. 기차가 가끔씩 신호대기를 위해 정차하는 아주 작은 역이다. 여름에는 사막의 열기와 모래폭풍이 겨울에는 폭설과 혹한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오지다. 역 주변에는 이런저런 상처를 간직한 사람 10여 명이 산다.

"스텝에는 모든 거리가 철도로 재어진다. 그리니치 본초자오선으로부터 경도가 정해지듯…그리고 기차들은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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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간이역에서 평생을 일해 온 노인 까잔갑이 죽으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는 동료 예지게이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전통대로 고인을 아나 베이뜨 묘지에 이슬람식으로 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지게이는 도시에서 온 노인 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신을 낙타에 싣고 아나 베이뜨로 향하는 장례 행렬을 출발시킨다.

묘지까지 가는 하루 동안 수많은 상념과 추억이 예지게이를 찾아온다. 2차 세계대전과 스탈린 독재, 냉전과 산업화 등 역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살아야 했던 간이역 주민들의 인생이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빛난다.

소설에는 징집, 포로, 반동, 처형 같은 격동의 중앙아시아 현대사를 상징하는 단어부터 사랑과 그리움 같은 낭만적인 단어들, 행성과 로켓 같은 첨단 과학 용어들이 아무 어색함 없이 버무려져 있다. 이 소설은 스텝을 닮았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 채 묵묵히 존재하는 스텝.

"스텝은 광대하고 인간은 보잘것없다. 스텝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며 누가 곤란에 처했건 아니면 좋은 상태건 상관하지 않는다. 스텝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곳이다."

행렬이 아나 베이뜨에 도착했지만 묘지는 철조망이 둘러쳐진 소련 우주기지로 변해 있었다. 일행은 어쩔 수 없이 아나 베이뜨가 보이는 언덕에 노인을 묻고 돌아선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흔히 말하는 '대서사시'라는 단어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된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살았고, 알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알았다…그리고 지구는 정해진 궤도를 따라 계속 돌았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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