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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남아 있는 나날 - 가즈오 이시구로 [김정섭의 내 인생의 책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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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경향신문]

경향신문

읽을 땐 담담했는데 두고두고 여운이 남는 책이 있다.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쓴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이 그런 책이다.

주인공은 영국의 한 저명한 저택에서 집사로 평생을 보낸 스티븐스라는 인물이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스티븐스는 주인을 성심껏 모시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직원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한다. 그는 그냥 집사가 아니라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인물이다. 일을 위해서라면 아버지의 임종도, 동료직원과의 소중한 인연도 기꺼이 희생하고 날려 보내면서 말이다.

인자한 주인 덕분에 생애 첫 여행길에 오른 스티븐스는 지나온 자신의 인생을 회상한다.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치렀던 이 모든 희생이 가치가 있었던 것일까. 더 큰 문제는 자신이 모신 주인이 나치 지지자였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성심껏 준비한 연회들도 결국 히틀러에게 이용당한 모임에 불과했음이 밝혀졌던 것이다.

그는 연회의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그건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외면했던 것이다. 위대한 집사가 되는 데는 성공했을지언정 위대한 인생을 사는 데는 실패한 걸까. 아니 잘못된 인생, 허망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을까.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에서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나치 부역자가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악마가 아니었지만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다 괴물이 된 경우였다. 성실하게 일상을 반복했지만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무사유의 죄악’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스티븐스가 아닐까. 주어진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려는 ‘위대한 집사’들이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소설 속 주인공처럼 인생의 황혼녘에 접어들어서야 지나온 나날에 대해 혼란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스티븐스도 우리도 아직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남아 있는 나날’이 있으니까.

김정섭 국방부 기획조정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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