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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7시간 여행가방 갇혔다 숨진 아동…한달 전 신고로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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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서 한달 전 '학대의심' 신고

또 한 명의 아이가 부모의 학대로 세상을 떠났다. 가해자인 40대 계모는 훈육을 빌미로 9살 아이를 여행용 가방에 7시간 가뒀다. 아이는 의식을 잃고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병원에 옮겨진 지 이틀 만에 사망했다.

최근 충남 천안에서 발생한 아동학대 사건을 미리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막을 수 있던 비극인 만큼 안타까움은 커진다.

4일 충남아동보호전문기관(아보전)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부모의 학대 정황이 처음 외부로 드러난 건 한 달 전이다. 어린이날인 지난달 5일 밤 머리가 찢어진 상처를 입은 아이는 순천향대천안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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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의붓아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7시간이 넘게 여행용 가방에 가둬 심정지 상태에 이르게 한 40대 계모가 3일 오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으로 향하고 있다.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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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모는 “아이가 욕실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쳤다”며 병원에 데려갔다. 몸에 난 멍 자국을 본 병원 측이 아동학대를 의심해 지난달 7일 112로 신고했다고 한다. 의료진은 아동학대 의심사례를 발견했을 경우 즉시 신고하도록 지정된 신고의무자다.

병원 관계자는 “진찰한 의사가 치료 당일 아이 손과 엉덩이에서 오래된 멍을 발견했고 개별 면담 과정에서 부모의 폭력 행위를 의심했다”며 “긴가민가해서 지난달 6일 학대아동보호위원회를 열고 여기서 학대 정황이 있다고 판단해 신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이튿날인 지난달 8일 관할 아보전에 이 사실을 통보했다. 하지만 상흔 사진과 경찰 조사 내용, 의료진 의견 등을 전달받은 아보전은 아이를 긴급하게 가정과 분리해야 할 정황이 없다고 판단했다.

지난달 13일 아보전 상담원이 처음으로 가정을 방문해 아이 상태 등을 살폈지만 이때도 심각한 학대가 있었다고 판단할 근거는 찾지 못했다는 게 아보전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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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저녁 학대 아동이 병원으로 옮겨지는 모습. 오른쪽 노란 옷이 계모. [연합뉴스TV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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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보전 관계자는 “아이를 부모와 분리한 채 독립된 공간에서 상담했는데, 아이가 부모에 대해 긍정적으로 진술했고 엄마와의 상호작용에도 특이점이 없었다”며 “중요 단서로 볼 수 있는 학교생활에서도 이상 징후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부모도 훈육 차원에서 체벌했다고 시인해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가정과 시급히 분리 조치할 건은 아니라 판단했다”며 “일단 경찰 수사를 지켜보면서 치료할 계획이었다”고 덧붙였다.

아보전은 학대 아동을 일시적으로 격리 보호하면서 부모의 친권 제한·상실을 시·도 지사에 요청할 수 있다.

이후에도 아이와의 상담을 시도했으나 부모가 가정 방문을 거부했다는 게 아보전의 설명이다. 아보전 관계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가정 방문에 어려움이 있었고 부모가 거부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강제할 수 없었다”며 “지난 3일 등교가 이뤄지면 학교를 통해 아이 상태를 모니터링하려던 차에 사고가 일어났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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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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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과 관련 기관 등의 해명에도 전문가들은 “막을 수 있었던 참사”라고 입을 모은다.

장화정 아동권리보장원 학대예방사업부 본부장은 “신고의무자의 신고에도 경찰과 아보전의 초동대처가 미흡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장 본부장은 “아이의 진술을 어느 정도 진실하게 믿느냐에 따라 개입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며 “멍 자국이 있었으니 이전에도 지속적인 학대 상황이 있었을 거라고 의심하고 응급상황이라 판단되면 아이를 부모로부터 분리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학대당한 징후가 틀림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가정에 남겨둔 셈인데 긴급보호조치를 해야 했다”고 강조했다. 긴급보호조치는 아동학대 사건이 발생하면 아동학대 현장에 출동한 아보전 직원이나 경찰이 아동을 학대행위자와 72시간까지 격리해 보호하는 것이다.

아동을 원가정에 두더라도 전문기관의 상담 등 후속 모니터링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봉주 교수는 “초창기에 밀접하게, 반복적으로 가정을 방문해 아이와 관계 설정을 하고 재학대 징후가 있는 지 지속적으로 점검했다면 적극적으로 조치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신고가 들어왔을 때 후속 작업을 얼마나 촘촘히 하느냐가 중요한 만큼 아동 입장에서는 징후가 있었음에도 사망사건에 이르기까지 방치된 것”이라고 말했다.

느슨한 아동학대 안전망을 좀더 촘촘히 하기 위해 관련 인력 충원과 예산 확보 등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 교수는 “재학대를 예방하기 위해 전문적이고 밀접한 수준의 서비스와 모니터가 이뤄져야 하는데 아보전의 현재 인력으로는 신고된 사안 처리만으로도 급급한 상황”이라며 “수조 원의 복지 예산에 비해 아동학대 보호 예산이 미미한 만큼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 아동학대 관련 예산은 약 297억원으로 80조원 넘는 전체 복지 예산의 1%도 안 된다.

조신행 보건복지부 아동학대대응과장은 “앞으로 현장조사업무는 시·군·구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이 하고, 아보전은 사례관리에 치중하면 전문성이 강화될 것”이라며 “학대 피해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아보전과 쉼터 등 보호기관도 늘려나가겠다”라고 말했다.

아동학대 관련 사업은 복지부에서 담당하지만 재원의 대부분이 복지부 예산(일반회계)이 아니라 범죄피해자보호기금(법무부)과 복권기금(기획재정부)에서 나오는 만큼 이를 일반회계로 전환하는 부분도 검토해나가겠다고 밝혔다.

황수연 기자, 천안=최종권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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