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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미 항공사 흑인 여승무원과 경쟁항공사 백인 CEO가 나눈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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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항공사 사우스웨스트(SW)의 14년차 베테랑 승무원인 흑인 여성 재커리 힐(38)은 지난달 29일 출근하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1주일 전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흑인 조지 플로리드의 사망으로 시위가 미 전역으로 번지고 있었고, 흑인인 자신이 어떻게 이날도 승객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게 할지 걱정이었다.

힐이 탄 플로리다 주 파나마시티 행(行) SW 여객기가 이륙한 지 30분쯤 됐을 때, 그는 25열에 앉은 한 백인 남성이 읽고 있는 책에 시선이 갔다. ‘백인의 불편함(White Fragility).’ 백인은 왜 인종차별을 얘기하기를 꺼리는지, 어떻게 이를 해결할 것인지를 다룬 책으로, 2018년 6월에 나와 베스트셀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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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웨스트의 흑인 여성 승무원 재커리 힐과 승객이었던 아메리칸에어라인 CEO 더그 파커/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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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은 그 남성 옆의 빈 좌석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그 책 어때요?”
상대 남성은 사우스웨스트의 경쟁사인 아메리칸에어라인(AA)의 CEO 더그 파커(59)였다. 그는 승무원 힐이 말을 걸어오자 “참 좋은 책인데, 절반 밖에 못 읽어서”라고 답하면서도, ‘아, 마스크를 썼는데도 날 알아봤군. 왜 SW를 타는지 궁금하겠지’라고 생각했다. 파커는 AA 여객기가 마침 그날 만석(滿席)이라, 경쟁사 SW의 여객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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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백인'의 책 표지


그러나 힐은 상대가 누군지 전혀 몰랐다. 힐은 “저도 주변에서 추천해서 읽으려 했는데, 마침 손님이 그 책을 갖고 타셔서 말하고 싶어서…” 그리곤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을 무겁게 눌렀던 감정이 갑자기 터진 것이다. 그러나 파커는 “미안해요, 우리 모두의 잘못이에요. 인종차별을 갖고 얘기해야 하는데”라며 위로했고, 힐은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둘은 이후 10분간 대화를 이어갔다. 파커는 “나도 부족하지만 특별한 순간이었고, 우리 모두가 이 주제를 갖고 진짜 대화를 해야 한다. 배우는 중”이라고 했고, 힐도 “나도 그렇다”고 했다.

대화가 끝날 무렵, 파커가 물었다. “이름이 뭐에요?” 힐이 “아!, 재커리에요”라고 하자, 남자도 “더그 파커요. 아메리칸에어라인 CEO입니다”라고 자신을 밝혔다. 힐은 깜짝 놀랐고, 자기 엄마도 워싱턴 DC의 레이건 국제공항에서 AA사 고객만족센터에서 일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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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더그 파커가 전자항공권 영수증 용지 뒤에 써 힐에게 준 감사 편지/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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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는 집에서 인쇄해 온 전자항공권 영수증(E-ticket) 뒷면에 “네게 와서 말을 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은 신(神)의 선물이고, 내게 큰 영감을 줬어요”라고 썼다. 그리고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고 이 주제로 계속 대화하고 싶으면 연락하라고 했다.

파커가 이날 들고 탄 책 ‘백인의 불편함’은 AA 이사 중 한 명이 예전에 추천했지만, 2월 말 이후 코로나 사태로 항공사들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읽다가 만 책이었다. 그는 “조지 플로이드의 끔찍한 죽음을 계기로, 우리에겐 코로나보다 더 큰 이슈가 있다고 생각해 이 책을 가져갔다”고 USA 투데이에 말했다.

그는 다음날(30일) 회사 임원들에게 승무원 재커리 힐과 나눈 대화를 담은 이메일을 보내며, 듣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금은 사람들이 다치고 있는 어려운 시기입니다. 나 역시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모르지만, 해답의 일부는 서로 얘기하고 듣는 것입니다. 대화를 시작하고 옳은 걸 위해 일어서는 것은 용기와 지도력이 필요한데, 재커리는 내게 그걸 가르쳐줬습니다.”

승무원 힐도 착륙 후 곧 엄마에게 이 얘기를 전했고, 엄마는 자신이 일하는 AA의 대표인 파커에게 ‘고맙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파커의 답신은 이랬다.

“당신의 딸은 내게 선물이었어요. 정말 특별한 여성입니다. 우리 모두처럼, 그는 왜 우리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왜 더 나아질 수 없는지 물었어요. 그는 분명히 착한 마음과 열린 정신을 갖고 있었어요. 딸을 잘 키웠더군요.” 그리고 물었다. “왜 우리가 딸을 사우스웨스트로 가게 했을까요?”

[이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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