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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동서남북/조용휘]전공노의 ‘부끄러운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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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휘 부산경남취재본부장

동아일보

부산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부산시청 1층 로비에서 점잖지 않은 광경이 일주일째 이어지고 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부산지역본부(구군노조) 소속 조합원 100여 명이 시청 사무실 출입구 앞에 매트를 깔고 주야로 연좌농성 중이다. 바닥에 드러눕거나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는 모습이 볼썽사납다. 출퇴근 때는 유인물을 나눠주거나 피켓을 들고 선전전을 펼친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는 시끄럽기 짝이 없다.

이들의 농성은 부산시가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지만 허를 찔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긴급재난지원금 업무를 일선 16개 구군에 맡겼다. 하지만 수요 예측을 잘못해 재난지원금 선불카드 지급이 중단됐고, 온라인 신청 사이트에 시가 별도의 재난지원금을 지급한다는 잘못된 정보도 제공했다. 구군에 항의가 잇따랐다. 업무 과부하로 화가 난 전공노 부산본부가 시에 사과를 요구했고, 시는 지난달 21일 13명의 지도부가 참석한 자리에서 담당과장과 팀장이 사과했다. 시장 권한대행도 28일 대시민 사과를 했다.

하지만 전공노 부산본부의 꿍꿍이속은 따로 있다. 사과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그동안 줄기차게 요구했던 ‘노정협의체’ 구성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큰 벽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소속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불명예 퇴진으로 부산시정에 틈도 생겼다.

지난달 22일 경찰이 접수한 시청 후문 앞 및 시민광장의 집회신고(5월 25일∼6월 20일)와 이후 벌어진 사태에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시장 권한대행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27일 시위를 벌이다 기습적으로 청사 내부로 진입했다. 당시 요구사항은 시와 전공노 부산본부의 노정협의체 구성, 재난지원금 사태에 대한 시장 권한대행의 사과, 갑질 행정 중단이었다.

이후 시장 권한대행의 면담 요구 수용 가능성에 즉시 면담, 노정협의체 합의서 작성 및 서명 요구,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김재하 부산본부장의 부상에 대한 사과와 책임자 처벌 등 요구사항도 그때그때 바뀌었다. 농성장에는 철도, 택시, 금융 등 민주노총 산하 각 지부 및 민중당 관계자도 수시로 가세하고 있다.

박중배 전공노 부산본부장은 “이건 불법 농성이 아니고 산하 직원들의 시장 권한대행 면담 요구이며, 각 지부 참여는 노조연대의 지지 방문일 뿐이다”라며 “힘없는 노조를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촛불로 탄생시킨 지방정부이지 않으냐”며 “(농성의) 주 목적은 노정협의체이고, 소통 창구인 노정협의를 못 할 이유가 뭐냐”고 따졌다.

시는 구군과는 공식 채널이 있고, 시에도 민주노총 소속이 아닌 부산공무원노조가 엄연히 있어 노정협의체는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서울, 경기 등 전공노와 의견을 나누고 있는 사례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정치적 부담감이 적은 시장 권한대행이 농성장을 지나치다 ‘훅’ 한번 들러 손을 내미는 것은 어떨까 싶다.

전공노 부산본부는 노노 갈등을 부추겨 부산시청에 복수노조를 만들겠다는 정치적 계산이 깔린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만나겠다”는 시장 권한대행에게 요구조건을 달지 말고 일단 만남의 물꼬부터 트길 권한다.

코로나19로 지친 한 민원인이 “배부른 공무원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라고 비꼬는 말이 가슴을 후비지 않는가.

조용휘 부산경남취재본부장 sile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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