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27 (금)

[문기자 잡담]'말딸'이 경마를 홍보한다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국제경마연맹(IFHA) 집계 기준으로 마권(馬券) 매출 1·2위를 다투는 경마 대국인 일본과 호주는, 상당히 희한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대중을 상대로 한 경마 홍보 전략을 꽤 특이하게 짠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경마 홍보물이나 마케팅 이벤트가 이 두 나라에선 더러 보이는 편이다.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개 추려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마무스메는 어떻게 말딸이 됐나

일본 회사 사이게임즈에서 제작 중인 게임 ‘우마무스메 PRETTY DERBY’엔 말을 의인화(擬人化)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현실의 경주마가 모델이다. 다만 우마(うま·말)+무스메(むすめ·아가씨) 제목 컨셉에 충실해, 성별만은 모두 여성으로 통일했다. 예를 들면 주인공 포지션 캐릭터인 ‘스페셜 위크’의 실제 모델은 1995년 출생해 2018년에 사망한 일본의 수컷 경주마다.

게임의 기본은 각자만의 말을 길러내 경주에 내보내는 것이다. 속도 승부가 전부는 아니며, 말과 교감하며 육성하는 과정 또한 중요하게 다룬다 한다. 지금은 서비스를 종료한 한국 승마 게임 ‘말과 나의 이야기, 앨리샤’와 흡사한 컨셉이다. 이 게임 역시 말트라이더(말+카트라이더)라 불릴 정도로 레이싱이 부각되긴 했지만, 말의 관리나 교배, 목장 경영 등 육성과 관련한 파트도 꽤 중시한 편이었다.

내부 사정으로 발매 연기가 거듭되긴 했지만, 일단은 올해 안에 게임이 나올 예정이다. 물론 또 미뤄질 수도 있지만 아무튼 현재로선 그렇다. 한국 유통도 계획 중이라 한다. 실제로 이들은 프로젝트 초기였던 2018년 1월 즈음에 예상 가능한 ‘우마무스메 PRETTY DERBY’ 한국어 로컬라이징 명칭을 모조리 상표 출원했다. 선점한 이에게 상표권료를 요구받거나 유사 작품이 속출하는 상황을 피하려는 조치인 듯하다. 이들은 ‘우마무스메’는 물론 ‘말소녀’, ‘말처녀’, ‘망아지처녀’ 등 웬만큼 연관 있어 보이는 이름은 다 휩쓸어 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펙트 있는 이름은 ‘말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 게임이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딸로 불리는 이유다.
조선일보

국내에서 만들어진 '말딸' 포스터./디시인사이드 아이돌마스터 갤러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게임을 출시하기에 앞서 같은 이름으로 애니메이션도 제작했다. 한국에도 애니메이션 채널 애니플러스를 통해 일본과 같은 시기에(2018년 4~6월) 동시 방영했다. ‘우마무스메 PRETTY DERBY’가 기본적으로 만화, 게임, 소설, 캐릭터 굿즈(상품) 등 다양한 매체를 염두에 둔 ‘미디어 믹스 프로젝트’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조선일보

우마무스메 PRETTY DERBY 애니메이션 제2R '갑작스러운 데뷔전' 中/네이버 시리즈온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우마무스메 PRETTY DERBY’는 일본 중앙 경마회(JRA)가 제작을 비공식적으로 지원한다. 좀 더 정확히는 게임 제작진과 JRA가 ‘긴밀한 협력과 존중’ 관계를 맺고 있다 한다. 고증 관련해 자문을 제공하거나, 게임사와 마주(馬主) 사이 다리를 놓아 경주마 이름 라이센스 문제 해결을 돕는 식이다. 또한 JRA가 과거 제작했던 TV 광고나 영상 등을 애니메이션에 일부 각색해 내보내기도 했다.
조선일보

게임상 레이싱 모드(위쪽 사진)와 육성 모드. 컨셉이 말이긴 하지만 겉모습은 사람이라 아무튼 달리기는 두 발로 한다. 개발 중 화면이기 때문에 최종판과는 차이가 날 수 있다./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굉-장한 콜라보

JRA가 공식 지원한 홍보 프로젝트도 있다. 2017년 6월부터 반년 간 진행한 ‘JRA x 케모노 프렌즈 콜라보레이션’이다. 의인화한 동물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미디어 믹스 프로젝트 ‘케모노 프렌즈’에 경주마 품종 중 하나인 ‘서러브레드’ 캐릭터 세 마리를 투입한 것이다.
조선일보

/유튜브 채널 'ZF'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에 앞서 2016년엔 ‘오소마츠 상’과 콜라보레이션을 했다. 일본의 인기 만화 ‘오소마츠 군’을 리메이크한 애니메이션으로, JRA 콜라보에선 오소마츠(おそ松)의 ‘소’(そ)를 ‘우’(う)로 바꿔, 우마(うま·말) 발음이 들어간 ‘오우마츠 상’으로 제목을 개조했다.
조선일보

/JRA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무슨 마약 하시길래

말이 말을 타거나, 말이 사람을 타거나, 말조차 아닌 동물이 경마장을 달리는 등 오묘한 센스로 유명한 ‘Japan World Cup’이라는 단편 경마 CG 애니메이션이 있다. 실은 이 역시 영상 작가 마시마 리이치로가 JRA의 ‘공식 협찬’을 받아 만든 영상이다.
조선일보

/영상 'Japan World Cup' 中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꼴이 적잖이 해괴할지언정 이래저래 사람 눈을 끄는 면이 있긴 한 작품인지라, JRA는 이를 물리치지 않고 홍보에 적극 활용했다. 나중엔 영상을 바탕으로 한 게임까지 만들었다. 현재 3편까지 발매돼 있다.
조선일보

/게임 'Japan World Cup 3' 中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Japan World Cup’을 원본으로 해 JRA와 일본스모협회와 게임회사 캡콤이 3자 콜라보레이션한 ‘Japan Sumo Cup’이라는 게임도 존재한다.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캐릭터와 스모 선수들이 말을 타고 레이싱을 벌이는 컨셉이다. 말만 들어서야 끔찍한 혼종같지만, 의외로 그럭저럭 할만한 게임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조선일보

게임 'Japan Sumo Cup'./루리웹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분홍신

호주도 일본 못지않게 경마를 홍보하는 방식이 비범한 편이다. 하지만 세세한 전략에선 일본과 차이가 있다. 일본은 주로 대중문화를 활용해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반면, 호주는 상궤를 벗어나는 기행을 벌이며 세상의 이목을 끄는 사례가 흔하다.

지난 2010년 2월 26일, 호주 시드니의 로열 랜드윅 경마장에선 말 대신 사람이 트랙을 내달렸다. 그것도 아주 울긋불긋한 사람들이. 이는 매년 시드니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동성애 축제인 ‘마디 그라’(Mardi Gras)를 하루 앞두고 열린 행사였다.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 환자 자선 단체인 바비 골드스미스 재단이 기금 마련을 위해 호주 기수 클럽(AJC)과 손잡고 개최했다.
조선일보

로열 랜드윅 경마장을 질주하는 드래그 퀸 6명./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 ‘핑크 스틸레토’(분홍 하이힐) 행사에선 드래그 퀸(여장남자) 6명이 관중 수천명 앞에서 경주마를 대신해 레이스를 벌였다. 론 파인모어 AJC 회장은 “이 ‘핑크 스틸레토’ 행사는 경마를 소개하는 새로운 테마”라며 “경마 전통과 게이·레즈비언 커뮤니티가 독창적인 융합을 벌이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날 바비 골드스미스 재단은 3만 호주달러(약 2500만원)를 거둬들였다 한다.

◇오페라 하우스를 지켜라

이들은 자국의 문화유산을 경마 홍보 광고판으로 쓰기도 했다. 지난 2018년 9월 글래디스 베레지클리언 뉴사우스웨일스 주(州) 총리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 경마 대회인 ‘에베레스트 컵’(Everest Cup) 광고를 내걸도록 허가했다. ‘세일즈’(sails·돛)라 불리는 오페라하우스 지붕들에 ‘에베레스트’ 글씨와 기수들 번호를 10분간 띄우는 방식이었다.
조선일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 게시할 '에베레스트 컵' 광고 시안./Sunshine Coast Daily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많은 시민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오페라 하우스를 광고판으로 쓰는 것을 반대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수원 화성에 카지노 광고를 띄우는 셈이니 무리도 아니었다. 광고 철회를 요구하는 온라인 청원에 호주 국민 30만명이 동참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최고경영자(CEO)인 루이제 헤런도 “부적절한 상업주의다”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 시드니 시장인 클로버 무어 역시 “도박과 동물 학대 산업을 위한 노골적인 상업화”라며 비판했다.

그럼에도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는 “연중 가장 큰 이벤트를 시드니 최대 광고판에 활용하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며 게시를 찬성했다. 총리까지 나서서 지지 의견을 표명한 이상 반대 여론이 암만 빗발친들 결정을 뒤집긴 무리였다. 결국 에베레스트 컵 주최측은 광고 게시를 강행한다.

그러나 이 광고가 사람들 눈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광고 개시 예정 시간인 2018년 10월 9일 오후 8시쯤, 호주 시민 수백명이 오페라 하우스 주변으로 몰려들어 손전등과 스마트폰 라이트를 쏘아 광고를 지져버린 것이다. 빛의 폭격을 맞은 광고는 뿌옇게 번지며 형체를 잃었다. 현장을 지키던 경찰 중 군중을 저지하는 이는 없었다. 광고사는 결국 6분 만에 게시를 포기했다. 재광고도 하지 않았다. 이들이 기획했던 광고 모습은, 지금은 그래픽 합성으로 만든 목업(Mock-up) 시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일보

빛을 얻어맞고 뭉그러진 '에베레스트 컵' 광고./Sunshine Coast Daily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문현웅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