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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선녀들'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혁명…"역사적 정당성 인정"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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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츠뉴스 나금주 기자] '선녀들-리턴즈' 설민석, 정유미, 김호중 등이 동학농민군의 발자취를 따라 갔다.

24일 방송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9회에서는 김세정, 영탁이 정약용 특집을 함께하는 그려졌다.

이날 정유미, 김호중이 등장한 가운데, 동학농민혁명 특집이 펼쳐졌다. 설민석은 오늘은 '응답하라 1894'이다. 역사에서 격동의 해를 한 해만 고르라고 한다면 1894년 갑오년이다"라고 밝혔다.

유병재는 '동학농민운동'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 부르게 된 이유를 밝혔다. 유병재는 "동학농민운동은 동학을 신봉하는 농민들이 일으킨 반란이라는 격하된 표현이었다. 지도자였던 전봉준도 반란군의 수괴라고 했다"라며 "2004년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백성이 주인이란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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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무가 "동학을 누가 처음 만들었냐"라고 묻자 설민석은 "최제우다. 누가 와서 동학이 뭐냐고 물으면 '민족 종교다'라고 하면 된다"라고 밝혔다. 천도교의 전신이 동학이라고. 설민석은 "신분이나 계급 같은 모든 건 껍데기고, 우리 마음엔 똑같은 하느님이 있다는 시천주 사상이 '사인여천', '인내천'으로 발전했다"라고 밝혔다.

설민석은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계기에 관해 "정조 승하 후 60년 동안 어린 왕들이 계승하다 보니 외척들이 득세하고, 국정을 농단한다. 나라가 바로 서려면 국가 공무원이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 과거 시험장에선 부정행위가 난무했다"라고 밝혔다. 삼정의 문란은 더 심해졌다고.

김종민은 "백성들이 가장 힘들어했던 세 가지가 있었다. 관리들의 수탈, 흉년의 굶주림, 질병에 따른 죽음이다"라고 덧붙였다. 설민석은 "그때 농민이라고 하면 전국민인데, 모든 국민들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라고 했다.

이어 선녀들은 격동의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선운사에 도착한 선녀들은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으로 향했다. 설민석은 "비밀의 배꼽에 비기가 담겨있다. 동학농민혁명이 벌어지기 전 비기가 세상에 나오는 날 세상이 망한다는 소문이 돌았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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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동학의 접주였던 손화중이 동학도 300여명을 이끌고 마애불의 비기를 꺼냈다고. 설민석은 "'정감록'이라고 들어봤냐. 정도령이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예언서다. 신앙이 많이 나온 건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힘들었단 반증이다

또한 설민석은 "18살 김구는 입교하자마자 접주가 된다. 그래서 별명이 '아기접주'였다"라고 밝혔다.

설민석은 "동학농민군은 삼례에서 집회를 열어 탄압 중지와 교조 신원을 요구했다. 이어 대표 40명을 뽑아 고종에게 복합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고종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주모자를 잡아들이라고 명한다. 이에 최시형의 명령 아래 동학농민군은 충청도 보은에서 집결한다"라고 밝혔다. 그전까지 동학이 종교집단이었다면 이때부터 탐관오리 처벌, 척왜양창의를 주장한다고.

이어 선녀들은 정읍으로 향했다. 설민석은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의 첫 번째 불꽃이 된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난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동을 하며 김호중은 '희망가'를 선보이기도 했다.

enter@xportsnews.com / 사진 = MBC 방송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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